국제사법재판소(ICJ)가 지난 1월 23일,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 (the 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이하 집단살해방지 협약) 적용 사건과 관련하여 미얀마에 잠정조치 명령을 내렸다.
감비아는 지난해 11월 11일, 미얀마의 로힝야 부족에 대한 탄압이 집단살해방지 협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ICJ에 미얀마를 제소함과 아울러 ICJ의 최종판단이 있을 때까지 미얀마의 라카인 주에 주로 거주하는 로힝야 그룹과 구성원, 그리고 집단살해방지 협약에 따른 감비아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ICJ가 잠정조치를 해 줄 것을 요청했다.
ICJ는 신청자의 청구가 일응의 관할권(prima facie jurisdiction)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에 잠정조치를 취한다. 이를 위하여 신청자의 권리가 보호받을 만하다는 점과 그러한 권리 보호와 청구된 잠정조치들 사이에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잠정조치는, ICJ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irreparable prejudice)가 분쟁 중인 권리에 야기될 것이라는 실질적이고 임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행사된다.
미얀마는 지난 12월 10일부터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궁에서 진행된 공개변론 절차에서 “감비아가 이슬람 협력 기구(OIC)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을 뿐, 감비아와 미얀마 사이에는 어떠한 실질적 분쟁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직접적인 분쟁 당사자가 아닌 감비아는 소를 제기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ICJ는 “감비아가 집단살해방지 협약의 체약국의 지위에서 동 협약에 따른 의무를 위반하였다는 미얀마를 상대로 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므로, 대량학살 협약에 따른 자신의 권리에 대해 미얀마와 직접 분쟁을 벌이는 것”이라며 미얀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감비아가 신청서를 제출할 당시 분쟁의 직접 당사자였는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8월 유엔 인권이사회가 설립한 UN 진상조사단(‘Fact-Finding Mission’)이 발표한 보고서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미얀마가 대량학살 금지에 따른 국가적 책임을 진다는 점을 단언하는 한편 감비아, 방글라데시, OIC가 대량학살 협약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에 미얀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는 것을 환영하는 내용이 담겼다.
■ 미얀마 “대량학살 협약 위반 의도 없다” 반박했지만..
감비아는 “미얀마 군대와 보안군, 그리고 그들의 지시와 통제에 따라 행동한 개인 또는 단체는 살인, 강간 그리고 다른 형태의 성폭력, 고문, 구타, 잔인한 대우를 한 것에 책임이 있으며, 이들은 로힝야 집단을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진 모든 행위, 즉 음식과 주거 기타 삶의 본질에 대한 접근의 파괴나 거부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며 미얀마의 협약 위반을 주장했다.
반면 미얀마는 감비아가 주장한 집단살해방지 협약을 위반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면서, 특히 “미얀마 정부의 일련의 질서유지행위에는 어떠한 대량학살 의도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집단살해방지 협약 제8조에 대해 유보한 감비아는 집단살해방지 협약 제9조에 따른 법원의 조치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한편 “설령 미얀마가 동 협약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감비아는 미얀마의 협약 위반으로 인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얀마의 집단살해방지 협약 위반에 대하여 ICJ에 제소할 청구적격(standing)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ICJ는 “당사국 사이에 여러 이견이 있음에 비추어볼 때 집단살해방지 협약의 해석, 적용 또는 이행과 관련한 당사자 간 분쟁이 존재하므로 ICJ는 일응 집단살해방지 협약 제9조에 따른 관할권을 가진다”고 결론 내렸다.
한편 감비아의 집단살해방지 협약 체약국으로서의 권리가 보호받을 만한지의 점에 대하여 ICJ는, 집단살해방지 협약의 조치가 국가, 민족, 인종 또는 종교 단체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 또는 제3조에 열거된 기타 처벌 가능한 행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주목했다.
ICJ는 미얀마가 공개변론절차에서 2017년 라카인 주에서 있었던 ‘인종 청소’로 일컬어지는 작업을 행하는 동안 일부 국제 인도주의 법률 위반이 발생했을 수 있다고 진술한 것을 상기하면서 “미얀마의 로힝야 집단과 그 구성원이 제3조에 언급된 집단살해 행위 및 관련 금지 행위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그리고 그 협약에 따라 미얀마의 집단살해를 방지하고 처벌할 권리는 보호받을 만하다”고 봤다.
■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지의 옹호도 “무력”
UN진상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10월 이후 미얀마의 로힝야족은 집단 살해, 광범위한 강간, 그리고 다른 형태의 성폭력, 구타, 마을과 집의 파괴, 음식, 피난처 및 기타 삶의 본질에 대한 접근 거부와 같은 피해를 받아왔다고 밝혔는데, ICJ는 특히 2019년 9월의 보고서가 “로힝야인들은 대량학살의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다”고 결론지은 것을 원용하면서 감비아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집단살해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미얀마는 공개변론 절차에서 “방글라데시에 거주하는 로힝야 난민들의 귀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현재 송환 시책에 참여하고 있으며, 라카인 주에서 민족화합과 평화,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 인도주의 및 인권법에 따라 군부의 인권침해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ICJ는 “이러한 조치들이 미얀마의 로힝야족 보호를 위해 감비아가 청구한 권리들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야기하는 행위들이 발생할 가능성을 제거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며 “이러한 고려사항에 비추어 볼 때, ICJ는 감비아에 의해 제기되는 권리에 대한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발생할 실질적이고 임박한 위험이 있음을 수긍한다”고 했다. 이로써 ICJ가 잠정조치를 내리는데 필요한 법령 상 조건을 모두 충족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ICJ가 미얀마에 대해 내린 잠정조치는 크게 네 가지로, 국제사법재판소의 이번 명령은 국제법적으로 미얀마를 구속하는 강제력을 갖는다.
(1) 미얀마는 협약 제2조에서 정한 바에 따라 로힝야 그룹의 구성원을 죽이거나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로힝야 그룹을 물리적으로 파괴할 목적으로 그들의 생존여건에 고의로 영향을 미치거나, 출생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여서는 안된다.
(2) 미얀마는 자국 영토 내 로힝야 그룹의 구성원과 관련하여, 군대와 그에 의해 지휘되거나 지원될 수 있는 비정규군, 그리고 그 통제, 지시 또는 영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조직과 사람들이 위의 (1)에 기술된 행위 또는 집단살해를 저지르려는 음모, 집단살해를 저지르려는 직접적이고 대중적인 선동, 집단살해를 저지르려는 예비 또는 집단살해의 공모를 하여서는 안된다.
(3) 미얀마는 대량학살 협약 제2조의 범위 내에서 관련된 증거의 보존을 위해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4) 미얀마는 본 명령의 발효일로부터 4개월 이내에, 이후 6개월마다 ICJ에 이 명령의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해 취한 모든 조치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번 명령에 대해 “지난 달 3일에 걸쳐 열린 ICJ에서의 공개변론절차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가 자국의 체계적인 인권 유린과 전쟁 범죄 혐의를 부인하고 국가를 옹호한 것을 국제재판소가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이라고 평했다.
모성준 주 네덜란드 대사관 협력관(부장판사)은 “이번 ICJ의 잠정조치결정은 중요한 국제협약 위반 행위가 있는 경우 직접 권리나 이익을 침해받지 아니한 체약국의 경우에도 청구적격이 인정된다는 점을 확인함으로써, 분쟁당사국이 아닌 제3국이 다른 체약국에 대하여 집단살해방지 협약 등 국제인권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을 이유로 ICJ에 제소할 가능성을 대폭적으로 확대하는 중대한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설명했다.
또한 “미얀마가 지명한 특별재판관을 포함한 재판부 구성원 전원이 감비아의 청구적격을 인정하고 있음에 비추어 위와 같은 청구적격의 확대는 번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모 협력관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중국의 신장위구르에서의 인권탄압이나 베네주엘라의 인권탄압 및 난민발생 등과 같은 국제인권법 위반행위에 대해서도, UN총회나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통해 그 시정을 구하는 것보다 각국이 ICJ 제소를 통해 해당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잠정조치를 받아내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