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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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스티스
- 한국법학원 월보 "저스티스(The Justice)" 지의 창간은 1957년 10월 1일이었다. 지금은 ”저스티스”가 논문집으로 간행되지만 창간시에는 월보로 간행되었다. 46배판 16면으로 된 이 저널은 당시로서는 가장 첨단적인 형태를 갖춘 국문 영문 겸용 저널이었다. 앞면 표지에는 “저스티스" 라는 제하에 저울을 들고 칼을 내려쥐고 있는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상(Justitia)이 세 권의 법전 위에 서 있고, 뒷면에는 "The Justice" 라는 제하에 같은 정의의 여신상에 The Korean Legal Center라고 새겨져 있다. 이 도안은 초창기 설립과정을 도운 미국인 법률가 그레이(Murray Gray)박사와 이태희, 엄민영 제씨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저스티스지는 1960년 2월에 4권 1호에 이르러 42면으로 분량이 늘어나고 이러한 체제와 내용으로 60년대 중반까지 70면 내외로 제9권 1호에 이르도록 꾸준히 간행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저스티스 간행이 중단되었으나 1972년 제6대원장으로 취임한 양준모 박사는 운영목표를 법조교육, 법학연구, 법을 통한 봉사의 세가지로 설정하고 논문집 "저스티스" 복간에 들어가 제10권(통권 15권)부터 간행을 시작하면서 면수도 종래 40여면에서 300여면으로 증보하여 년1회 간행하였다. 1996년 1월 박승서 원장의 취임과 함께 년2회 발간하던 "저스티스" 를 4회 간행으로 증보하고 2000년 박우동 원장의 취임과 함께 현행 체제인 년6회 간행으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니며 저스티스는 2006년 6월호를 기준으로 총 104호가 발간되었고 논문편수로는 총 1600여편이 실렸다. 저스티스는 법조계와 법학계를 아우르는 한국의 유일한 학술지이고 우리나라의 법의 발생과 성장을 함께 하며 이제는 우리나라 법의 미래를 제시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법학 학술지가 되었다.
- 한국법학원 월보
- 한국법학원 월보는 1972년 7월 15일 한국법학원장 양준모 박사께서 “전체회원의 적극적인 침여와 협력을 위하여, 법학원의 활동과 회원의 참여상황 및 요망사항 등을 종합하여 널리 알리고, 함께 생각하는 것을 보도하는 기관지가 필요하다는 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매월 1회 법학원의 소식을 담아 월보를 발간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법학원 월보는 법학원 소식뿐만 아니고 회원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월보는 창간하여 1978.3.20. 제69호까지 간행 후 폐간되었으나 1996.8.1. 박숭서 원장께서 제70호부터 복간하였고 2000.2.25. 제8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다.
한국법학원 월보는 70년대 초의 법학자들의 상황과 분위기를 한눈에 엿볼수 있고 또한 그들이 연구한 학술적 가치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지나며 저스티스는 2008년 6월호를 기준으로 총 104호가 발간되었고 논문편수로는 총 1600여편이 실렸다. 저스티스는 법조계와 법학계를 아우르는 한국의 유일한 학술지이고 우리니라의 법의 발생과 성장을 함께 하며 이제는 우리니라 법의 미래를 제시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법학 학술지가 되었다.
- 대한민국영문법전 LAWS OF THE REPUBLIC OF KOREA
- 1. 대한민국영문법전 초판 간행(1964년)
한국법학원 연구부와 번역부에서는 1958년부터 한국의 법령과 관보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국내외 기관들에 배포하여 한국법령의 홍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국법제를 연구하는 외국기관과 대사관 및 외국의 학자들에게는 단행본으로 된 영문법전의 간행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1964년에 국판 1327페이지의 영문법전을 한국법학원에서 간행한 것은 국내 유일의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 영문법전의 간행에는 백남억 국회법사위원장, 배영호 국회사무총장, K.C. Krawford 미8군 법무관, Denny F. Soott 법률고문 등의 노력이 컸다.
2. 「대한민국영문법전」제2판 간행(1969년)
1964년에 간행한 이후 5년 동안 수록법률에 대한 개정이 많았고 수록법령의 범위가 작았으므로 1969년에는 이를 보완하고 29개 법령에서 61개 법률로 대폭 증보하여 대한민국영문법전 제2판을 간행하였다. 미국대사관과의 계약에 띠라 한국의 법령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미국대사관과 외국공관 및 국내외 각 기관에 배포하였다. 이 비공식 번역본의 내용은 1960년대에 총 2151건에 이르렀고, 789건의 대통령령을 영문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170건의 부령을 영문으로 번역 배포하였다.
3. 「대한민국영문법전」제3판 간행(1975년)
한국법학원에서는 영문법전을 1964년에 초판, 1969년 재판을 간행하여 정부기관 및 주한외국기관을 비롯 일반기업에까지 배포하여 크게 공헌한 바 있다. 양준모 원장은 제3판을 발행하기 위하여 1974.3.13. 제1차 편집위원화를 개최하고 사업을 추진하였다. 김두현 원장은 간행사업을 착수하고 부족한 재원확보를 위해서 경제계의 재벌그룹관계자와 직접 교섭하여 기부찬조금 확보에 많은 노력을 하였고, 수익사업으로 아시아재단, 삼성그룹, 한화그룹, 한진그룹, 현대그룹, LG그룹, 대우그룹, 선경그룹에서 지급한 기부찬조금을 재원으로 하여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가제식 영문법전을 전3권 3.000여면으로 간행하였다.
4. 「대한민국영문법전」 제4판 간행(1983년)
대한민국영문법전은 법률문화의 향상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과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사단법인 한국법학원이 판사, 검사, 변호사, 법학교수, 법제관, 군법무관 등 전회원의 성원과 국내외 독지가의 지원으로 우리나라 현행법령을 영문으로 번역한 노작이다. 그동안 영문법전은 한국법학원에서 제3판까지 간행하여 왔으나 수록된 법령의 범위가 좁은데다 양장제본으로 제본되어 그간 이루어진 법령의 개정으로 그 실효성이 미흡한 점이 많았던바, 제4판에서는 수록법령을 대폭 증가시키고 각 법령별로 권위있는 편집위원이 번역을 하였으며 제본도 가제식으로 함으로서 법령의 개정이 있더라도 이를 번역하여 가제, 보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수록법령의 범위도 더욱 확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법전을 가제식으로 간행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영문법전은 국내외 판사, 검사, 변호사, 법학교수, 법제관, 군법
- 간행사
- 2006년은 사단법인 輯國法學院이 설립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56.7.16. 서울 서소문 대법원 희의실에서 우리나라의 지도적 법률가들이 모여 輯國法學院의 설립을 위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고 정관을 만들어, 같은 해 7. 31. 법무부장관의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輯國法學院의 발기인들의 설립취지를 요약하면 우리나라는 民主的인 法思想과 法體系의 확립이 긴급히 요구되고 있으나 과도기적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法後制度는 大陸의 組織的인 體系와 치밀한 理論을 답습하여 왔으므로 法曹人의 대부분은 이와 대치적인 입장에 있는 英美法 기타 외국법의 연구조사기회가 희소하였고 大陸法 體系와 理論으로서는 간혹 구체적 사실과 모순됨이 없지 않아 구체적 타당성을 신조로 하는 英美法 기타 外國法을 적절히 조화시킴으로서 法後秩序의 완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인데 이를 연구할 자료나 시설이 불비한 터에 우방 英國 法曹人들의 물심양면의 협조를 받아 국내 法曹人들을 망라한 공동연구단체로 輯國法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朝鮮王朝가 근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日本에 병합되어 36년간 식민지 통치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朝鮮王朝에서 바로 근대적 민주법치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식민지 통치기간 중 西歐 大陸法系의 法律制度를 부분적으로 경험해 왔을 뿐이었습니다.
1945.8.15. 日帝에서 해방되어 美栗政을 거쳐, 1948.7.17. 主相在民, 基本權保障, 三權分立 등을 내용으로 한 근대적 民主國家의 憲法을 제정하고 大韓民國을 출범시켰으나 民主的 法治主義를 감당할 人的자원과 경험의 부족 등으로 司法行政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1950.6.25. 동란을 거치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가중되었다가, 1953년 휴전 이후 국가가 정돈되는 과정에서 당시 우리나라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民主的 先進國家인 英國의 法. 즉 英美法의 소개와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54년부터 미국 Southern Methodtst University 法科大學長 Robert G. Storey 박사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法律家와 기관들의 지원으로 우리나라의 판사, 검사, 변호사, 법학교수들이 모두 참여하는 연구기관의 설립이 구체화 되어1956년 7월에 그 결실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50년간 輯國法學院은 우리나라의 法曹 霄務界와 學界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법률가 단체로서 법률도서관의 설치와 정보제공, 英美法 등 법률강좌, 각종 法學會의 창설, 학술 심포지움, 대한민국 英文法典의 간행, 저스티스 학술지의 간행, 법률가의 국제교류와 해외 유학 주선, 법학논문상 시상 등 우리나라 사법행정과 법률문화의 발전과 세계화를 선도해 왔습니다.
輯國法學院이 설립될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는 2,150만명이었으나 현재는 인구 4,700만명에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하여 수출규모 2,542억불의 세계10위의 교역국이 되었고, 1인당 국민소득도 1만불이 넘어 WTO, OECD 가입국가로 세계경제의 주류에 참여하여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법조계도 경제발전에 발맞추어 성장하여 輯國法學院 설립 당시 1,000명 미만이던 法菌 인구가 12,000명을 넘어섰으며 법원, 헌법재판소, 법무부, 검찰, 변호사회, 법과대학, 각종 법률학회 등이 量的으로나 質的으로 세계적 수순에 다가가고 있으며 국제적 위상도 높아져 우리나라 법조인이 국제형사재판소, 국제구유고전범재판소, 국제해양법재판소 등 국제사법기구에 재판관으로 나가있는 상황 입니다.
이제 輯國法學院은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50년의 법조계의 역사를 돌아보며 앞으로의 50년을 내다보아야 할 시점에 서있습니다.
우리나라 司法은 비약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흡한 점이 많아 司法개혁의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司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고 선진 法治國家로 진입하기 위하여는 선진 제도의 도입 뿐만 아니라 모든 법적절차에서 예측가능성과 투명성의 확보로 법적안정성을 고양하고 법집행에 있어서의 공정성과 엄정성의 확립으로 국민의 준법의식을 한 단계 높이는 작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大陸法 體系에 英美法體系를 도입하면서 韓國法의 世界化를 도모하고 있으나 이와 함께 우리법제의 고유의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개발도상국가에 전수해 줄 법제도나 경험이 무엇인지도 정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輯國法學院이 설립 50주년을 맞아 50年史를 발간하는 취지는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입니다.
끝으로 輯國法學院 50年史를 발간함에 있어 크게 재정적 도움을 주신 前 院長이시고 현재 국가청렴위원회 위원장이신 鄭城鎭 박사님, 50年史 概要를 정리해 주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崔鐘庫 교수님, 그리고 모든 자료를 세밀하게 정리하여 주신 輯國法學院 金完洙 사무국장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 2006년 5월 15일
輯國法學院長 李 載 厚
한국 법학원 50년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