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사회이론학회(회장 황승흠)가 지난 1월 30일, 성신여대 성신관에서 2020년 동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야기, 이미지 그리고 법: 법학과 인문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문학과 미학, 정신분석학의 세 가지 측면에서 ‘법학적 쓰임새’를 조망해 보는 발표가 이뤄졌다.
이날 발표자로는 김경민 경남과기대 교수, 박지윤 연세대 객원교수, 김문정 변호사가 나섰으며 토론자로는 제주대 이소영 교수, 한양대 김청강 교수, 서울대 손제연 박사가 참여했다.
■ 난민 문제, “법과 문학이 머리를 맞대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화두”
김경민 교수는 ‘경계 위의 인권: 문학적 인권담론의 가능성’이라는 주제 하에 특별히 난민 문제를 짚었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 헌법은 권리와 의무의 주체를 ‘국민’으로만 규정하고 있어 이들을 우리 사회에서 타자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면서 “난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탓에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갖는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난민은 그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난민법과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심사를 받는다. 김 교수는 “다른 나라의 난민센터가 대부분 외교부 소속인데 반해 우리는 법무부 소속이라는 점은, 대한민국에서 난민이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라는 점을 나타내 준다”고 비판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난민을 바라보기 이전에 난민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과정을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의 삶에 직접 가 닿을 수 있는 문학이 이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도 했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추상화된 보통명사 ‘난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찬드라’, ‘웅가’, ‘모샤르’, ‘뚜앙’을 만날 수 있다. 정부나 언론이 제시하는 정형화된 몇몇 이미지와 통계자료의 숫자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다양한 정서적 반응을 느끼게 되고, 이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김 교수는 “이렇게 이들을 향한 공감의 경험이 축적되고 정서적 거리감이 좁혀지면, 그만큼 난민을 향한 사회의 왜곡되고 제한적이었던 인식의 편견 역시 줄어들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들 난민을 그리는 문학 작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했다. “부족이라기보다 부재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난민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김 교수는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묘사하거나 규정하며, 보다 가치 있고 바람직한 모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법과 문학은 닮았다”면서 “법과 문학이 공유하는 대상은 무궁무진하지만, 그중에서도 인권은 법과 문학이 함께 머리를 맞대기 가장 좋은 화두”라고 했다. 난민 문제 역시 법과 문학이 머리를 맞대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화두라는 것이다. 그는 “법과 문학은 이들과 함께 할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고, 갈등의 해결이나 최소화 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김 교수는 “난민과 공존하는 우리 사회가 마냥 장밋빛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규범과 문화에 이들이 무조건적으로 순응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서 “이런 기대 자체가 또 하나의 거대한 폭력일 수 있음은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법을 생성하는 예술로서의 아르스, ‘정의’에 대한 인식 변화의 동력되기도”
‘정의의 여신상과 소녀상’을 주제로 미학과 법학의 관계를 고찰한 박지윤 교수는 ‘기술, 기예, 학술, 예술’로 번역되는 라틴어 ‘아르스’를 예술과 법의 접점으로 봤다. 로마의 법률가 켈수스(Celsus)가 ‘법은 선과 형평의 기술(ars)’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법과도 직접적 관련을 맺는 단어로 여겨지고 있다.
박 교수는 “라틴어 ius(법)가 iustitia(정의)를 어원으로 한다는 점에서 예술로 표현된 정의의 상(像)을 살펴보는 것은 아르스의 측면에서 법을 생성한 예술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연구 의도를 밝혔다.
전통적으로 정의의 여신상은 인간의 일을 내려다보고 형량해서 법에 따라 판단하여 검을 휘둘러 벌을 부과하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오늘날 정의의 상은 그 모습들이 사뭇 다르다.
박 교수는 먼저 2017년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미국 뉴욕 금융가 월스트리트 황소상 앞에 세워진 ‘두려움 없는 소녀상’을 언급했다. 남성 중심적 미국 경제계를 대변하는 황소상 앞에 우뚝 선 이 소녀상은, 머리카락과 치마가 바람에 흩날리는 가운데 두 손을 허리에 얹고 당당하게 고개를 든 모습을 하고 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이는 승자독식적 경영·경제 시스템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여성적 리더십의 필요성을 고취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최근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을 반대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된 홍콩에는 각 주요 지역에 ‘자유의 여인상’이 등장했다. 지난해 10월에는 홍콩 사자산(Lion Rock) 정상에 높이 3m 정도의 ‘자유의 여인상’이 세워졌는데 방독면과 고글을 착용하고 한쪽 손엔 우산을, 다른 손엔 ‘홍콩 해방, 시대 혁명’이라는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실제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시력을 상실한 홍콩 여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끝으로 박 교수는 한국의 ‘평화의 소녀상’을 말했다. 2011년 12월 일본 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현재 국내 100여개, 국외에 10개의 상이 세워져 있다. 소녀상에는 다양한 상징이 동원됐는데 단독으로 세워진 것도 있지만 빈 의자를 나란히 둔 소녀상이 대표적이다. “위안부의 경험과 가해진 폭력을 증언하기 위한 이 소녀상은 제3자에 의해 정의를 부여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권리를 증언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박 교수는 “전통적으로 정의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기 위한 분배의 문제로 여겨졌고, 정의는 공정을 위한 원칙의 문제라고 여겨졌지만 현대에 와서 변화된 정의의 상을 살펴보면 이제 우리는 정의를 단순히 분배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정의의 심판자인 동시에 수용자이자 참여자로써 인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즉 “이제 정의는 외부로부터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내부에 존재하는 공간이자 정치적 책임의 차원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오늘날 정의의 상들이 대변하고 있는데, 법을 생성하는 예술로서의 아르스가 이러한 변화의 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 “법정신분석학, 논리적 타당성과 무관한 윤리적 규범 성찰에 도움”
‘거울로서 법: 르장드르의 법인식론을 중심으로’를 발표한 김문정 변호사는 “법전과 판례를 텍스트로 하여 법실증주의라는 객관적 방법론을 통해 법의 해석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논의하는 데서 그 학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법학은 근저에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는 근대성이 자리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법학이 외면하는 무의식을 성찰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건설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법은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될 수 있는데, 그러한 각 관점에 대해 논증하는 이론을 ‘법인식론’이라고 한다. 특히 피에르 르장드르의 법인식론은 합리적 논증뿐 아니라 비합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사학적 비유를 동원해서 법에 대한 인식을 시도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거울로서의 법’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되새기지만 거울에 비친 이미지 자체가 곧 나의 실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르장드르는 이러한 ‘동일시’와 ‘소외’의 분리를 동시에 수행하는 거울의 구조를 통해 법을 사유한다.
거울은 나를 객관화하면서 한편 나를 주체로 만드는데, 즉 거울은 동일시와 소외 기능을 통해 이미지는 해석의 대상으로 놓고 거울 앞의 주체는 해석자의 위상에 놓는다. 이렇게 거울로서의 법은 인간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소외를 야기함으로써 개인과 사회를 출현시키는 사회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한편 거울은 이미지를 통해 거울 앞에 그 이미지의 기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우리는 이 이미지를 봄으로써 실재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르장드르는 이 이미지가 외부로부터의 비판의 한계 지점이자 내부로부터의 논증의 시작지점인 ‘도그마’라고 이해한다.
법학은 준거할 텍스트를 선별하고 관리하며 조합함으로써 도그마로부터 유래되는 인과관계를 재구성한다. 거울로서의 법은 주체의 기원이 있음을 알려주는 결과로서의 이미지와 주체를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시킴으로써, 제도적 차원 위에 인과관계가 구축될 수 있도록 보증한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르장드르는 규범을 받들고 준수하게 만드는 힘은 규범이 보여주는 논리적 타당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규범이 보여주는 이미지가 지닌 도그마의 힘에서 나온다고 본다. 진리로부터의 준거를 구축하는 제도적 인과성이 이미지를 통해서만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재현된 이미지에 강력하게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이렇게 텍스트의 이면에 있는 이미지를 성찰하여 서구 근대 규범에 회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주장이다. “그 이면에는 논리적 타당성과 무관한 규범해체와 생성의 힘이 자리한다”고도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법정신분석학적 윤리의 실천이란 거울로서 법이 비춰주는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두고 법 또한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직시해보는 것”이라면서 “거울을 인식하고 거울이 비춰주는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거울이 재현하는 예속적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법학은 총체적 세계를 명확한 언어로 환원시켜 이해하려 하지만 정신분석학은 상징화될 수 없는 지점을 논하기에, 법학과 정신분석학이 조우하는 지점은 특정되면서도 불특정한 곳, 곧 법학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