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 4월 7일, 제27차 젠더와 입법포럼을 열고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한 법제도를 모색했다. 한국젠더법학회, 한국여성변호사회 등과 함께 주최한 이번 행사는 ‘n번방 사건’과 같은 일련의 디지털 성범죄가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는 원인을 짚어보고, 관련 법제도 현황과 개선점을 살펴보는 자리로써 마련됐다.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시책으로 포럼은 청중 없이 비공개로 진행됐으나, 현장 연상은 4월 13일부터 17일까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유튜브 채널을 통해 한시적으로 공개됐다.
■ 디지털 성범죄의 확산, “법 만들고 집행할 기성세대가 따라잡지 못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김애라 부연구위원은 성범죄가 디지털 플랫폼과 결합하여 나타나는 이러한 범죄의 원인으로 △대단히 빠른 한국의 네트워크망과 국민의 높은 디지털 문해력 △변화가 더딘 성문화 및 성차별적 인식 △디지털을 매개로 한 성범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인식과 법제도 등을 짚었다. 나아가 “이러한 범죄는 단순한 성폭력 범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되는 것’이란 점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김 부연구위원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거래할 채널을 만드는 것과 함께 운영할 조직원 구하기가 매우 용이한 점, 성착취물 소비자의 연령이나 물리적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점은 이러한 범죄의 산업화가 단기간에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면서 성착취물의 소비와 소지, 유포, 제작 환경에는 실제 진입장벽이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웹하드 카르텔에서 보듯, 성착취 산업에서 플랫폼은 매우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며 플랫폼 서비스 자체에 대한 역할 요구와 지원도 적극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편 n번방 사건으로 인해 세대간 블록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도 중요하게 짚었다. 김 부연구위원이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n번방 사건의 피의자 대다수는 10대 후반(25명)과 20대(78명) 및 30대(30명)이며 피해자 또한 청소년이 절대 다수다. 이 사건이 최초로 수면 위에 떠오른 것도 학부생들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이라는 단체를 통해서다. 즉 기성세대는 이와 같은 디지털 문화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법제도를 만들고 시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성별 간 블록화의 심각성도 간과할 수 없다. 김 부연구위원은 “뿌리깊은 남성중심적 성문화가 디지털플랫폼이라는 새로운 매개체를 통해 계속해서 연결되고 있으며, 성착취 영상을 함께 보면서 후기를 공유할 뿐 아니라 기획·제작·유포에 공동으로 관여하면서 때로는 경쟁하는 등 불법적 실천을 위한 남성연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부연구위원은 이러한 범죄유형에서의 ‘피해’를 기존 범죄의 틀 안에서만 사고하는 것이 사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미지 유포에 대한 피해자의 두려움과 이미지 강탈이라는 피해의 심각성을 법원이 공감하지 못하고 경시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김 부연구위원은 “여성의 신체가 여전히 성적대상이자 협박, 모독, 수치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전사회적 자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재판부가 ‘성적 수치심’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과 달라지는 건 현행법의 한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윤덕경 연구위원은 “디지털 성범죄라는 용어는 현재 법적 용어가 아닌 정책적 용어”라면서 “디지털 성범죄로 일컫는 범죄의 유형들은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 음란물 유포 등 죄, 아청법상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의 제작·배포 등 죄, 전기통신사업법상 온라인 사업자의 불법촬영물 등 유통방지 조항을 통해 규율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 연구위원이 짚은 주요 현행법상 한계로는 △실무상 영리목적으로 불법촬영물을 인터넷에 유포한 경우, 피해자를 특정하고 특정 부위를 채증하는 증거확보가 어려워 7년 이하 징역의 성폭력처벌법으로 처벌하지 못하고 1년 이하 징역인 정보통신망법상 처벌로 규율하게 되는 점 △합의된 성적 촬영물이지만 동의 없이 유포된 이후, 이를 제3자가 재유포하는 행위는 정보통신망법상 음란물 유포죄로 처벌할 뿐 성폭력범죄로서 가중처벌이 불가한 점 등이다.
또한 “재판부가 ‘성적 욕망’이나 ‘성적 수치심’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죄의 인정/불인정이 갈리는 것도 현행법의 한계”라면서 “이는 우리 형법이 아직도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을 ‘여성의 정조’로 보고 있다는 것이며, 성적인 판단을 주관적 개념인 수치심, 혐오감, 도덕관념 등에 의존함으로써 불명확성만 가중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윤 연구위원은 이러한 현행법의 개선책으로 적절한 양형기준 마련을 촉구하는 한편, 성폭력방지법에 디지털 성범죄의 정의를 명시할 것과 형법에 사생활 침해범죄 신설 및 불법영상물 유통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을 제시했다. 배상액은 불법영상물 유통에 대한 불법정도, 사업자가 취한 부당이익, 실제 손해의 정도, 사회적 의의, 재발방지를 위한 위하적 효과 등을 고려해 정할 것을 제안했다.
디지털 성범죄로 인해 여성들이 입는 피해에 대한 사회 인식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점에 대해서는 윤 연구위원도 의견을 같이했다.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범죄는 불법촬영에서 끝나지 않고 유포와 재유포가 끝없이 이루어져 그 영상물이 어디까지 유포되었는지 알 수가 없고, 따라서 완전한 삭제가 어렵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고통이 매우 크다는 심각성이 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