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법학회(회장 이원우 교수)가 지난 12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논의는 대의민주주의의 위기, 시행령 정치, 공론화위원회, 사법의 정치화 등을 핵심 주제로 하여 총 4세션에 걸쳐 진행됐다.
이원우 회장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및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공법학은 2020년 새로운 100년을 맞이하게 됐다”면서 “(이번 학술대회는) 현대사회에 나타나는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목격되는 전통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라고 소개했다.
■ ‘대의민주주의 고장 현상’은 세계적 흐름...“헌법정책학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한양대학교 정책학과 윤성현 교수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가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중남미 등 일부 개발도상국의 전유물로 취급됐던 소위 포퓰리즘 정치와 선동·분열·혐오의 정치가 각국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과 “미국·일본 등에서 ‘스트롱맨 전성시대’가 나타난 것”을 그 예로 들었다. 극우화 조짐이 감지되는 서유럽 혹은 북유럽과, 자유민주주의로의 체제전환 중 다시 권위주의 체제로 유턴하는 동구권 또한 대의제의 한계가 나타난 것으로 봤다. 윤 교수는 “한국의 촛불혁명 혹은 촛불시민항쟁을 통한 대통령 탄핵 사건 역시 대의민주주의가 임계점을 넘어 ‘시민주권’의 행사를 불러온 극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 같은 ‘대의민주주의 고장 현상‘이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진단 위에, 그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민주적 거버넌스를 디자인하는 ’적극적 헌법정책론이‘ 요청된다”고 주장했다. “헌법상 민주주의는 곧 대의민주주의이고 직접민주주의는 예외적으로만 적용된다는 과거의 이분법적 도그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면서 “헌법상 민주주의 논의가 이제는 헌법해석론적 접근을 넘어 정치학·사회학·커뮤니케이션학 등 사회과학의 성과를 포괄하는 헌법정책학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윤 교수는 민주주의 원리를 ‘참여’와 ‘숙의’의 기초 개념으로 구체화하고, 이러한 개념·원리적 토대 위에 민주적 제도들을 상호 연계, 결합, 대체하는 거버넌스 방식(이른바 ‘하이브리드 민주주의’)을 제안했다. 참여와 숙의를 가장 폭넓게 충족할 최적화된 방식이라면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이건, 국민투표·국민발안·국민소환과 같은 전통적 직접민주주의 제도이건, 공론조사·추첨시민의회 등 오늘날 새롭게 거론되는 방식이건 배제하지 말자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 방식이 민주주의 원리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원리를 충족하는 제도는 일단 거버넌스 목록에 올려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러한 새로운 거버넌스의 구성은 중장기적 로드맵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룩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윤 교수는 “우선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를 수정·보완하는 형태의 제도들을 먼저 도입하고, 추이를 보면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며 시민정치로의 대체가능성을 타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 “민주주의가 이성적 원리로도 작동해야 한다는 주장, 위험할 수 있어”
제1주제 토론자인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이계수 교수는 윤성현 교수의 발표에 대하여 “촛불시위와 대통령 탄핵이 대의민주주의의 몰락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대의민주주의의 재흥(再興)을 불러온 사건인지에 대하여 평가는 갈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참여를 통해 의사결정의 질을 제고해야 한다는 설명은, 어떤 절차에 따라 어떤 결정이 내려져야 의사결정의 질이 제고된다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이 명확하지 않은 이상 공허한 기표들에 불과하다”며 “민주주의가 단순히 다수결의 수 원리에만 그치지 않고 이성(reason)의 원리로서도 작동해야 한다는 말은 전체주의 등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위험해질 수 있는 주장”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또다른 토론자인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차진아 교수는 대의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다는 윤 교수의 시각에는 동조했다. 다만 “대의민주제의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고 하여 모든 것을 직접민주제에 맡길 수는 없다”며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광장 민주주의가 가진 한계, 숙의민주주의와 공론장에서의 토의가 갖는 한계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촛불 이후 집권한 현 정권에서 더욱 심해진 정치권 보혁 갈등과 국민의 편가르기는 과거의 망국적 영호남 갈등까지 재현하고 있다”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정상화를 위해 국민의 주권의식과 시민의식, 정확한 정보 통한 올바른 판단 및 여론 형성과정에서 왜곡을 방지할 언론의 역할 등이 중요하다”고 했다.
■ “‘시행령 정치’로 법률 대체하는 건 법률유보원칙 위반”
숙명여대 법대 정남철 교수는 “행정입법에 대한 민주적 통제- 의회입법의 실패와 소위 ‘시행령 정치’ 문제를 중심으로”를 발제했다. 지난 20대 국회의 여야 협치 부재와 그로 인한 국회의 입법기능 부재는 정부가 법률로 규정해야 할 사항을 시행령 개정을 통해 이루도록 하는 한 원인이 됐다. 소위 ‘시행령 정치’라고 부르는 이런 현상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한 자율형 사립고 등 일괄 폐지, 교육부령 개정을 통한 사립유치원 회계시스템 에듀파인 도입, 법무부 훈령으로 제정된 ‘형사사건 공개 금지 등에 관한 규정’ 등에서 나타났다는 것이 정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기본권 실현에 있어 본질적인 사항을 국회가 제정한 법률이 아니라 행정부의 시행령으로 규율하는 것은 법률유보원칙(본질사항유보설)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이러한 행정입법의 민주적 통제에 관한 여러 방안을 제시했다. 먼저는 국회가 수정요구를 넘어 행정입법에 대해 ‘동의’하도록 하는 절차를 도입해 의회 통제 강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국회에 제출된 대통령령이나 총리령이 ‘헌법이나 법률을 명백히 위반하는 때에 한하여’ 국회 동의를 얻도록 해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절차적 정당성 확보 필요성도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행정입법 제정절차에 일반 공중의 의견수렴을 강화하면서 그 결과까지 모두 공시하도록 하는 입법례를 참고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밀실행정을 차단하면서 행정의 투명성·공정성도 제고할 방안이라는 설명이다. 미국 또한 행정절차법에서 명령제정절차에 공지 및 의견제출의 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정 교수는 “현대사회의 불확실성과 리스크의 증가로 인해 입법 전문성과 기술성이 요구되고 있으므로 국회와 집행권의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한편 “코로나19와 같은 긴급한 재난상황에서는 신속한 입법이 요구되는데, 행정입법이 형식적 의미의 법률을 대체하는 등 국가권력이 남용되어 국민의 기본권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법률보다 시행령이 더욱 피부에 와닿는 규범 되었다...국회 검토 필요”
제2주제의 토론자로 참여한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정하명 교수는 “행정입법으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가 문제될 경우 헌법재판소에서 사건을 다루게 하는 현재 상황에 많은 장점이 있는데, 헌법과 행정소송법을 개정해서까지 일반 법원에 행정입법에 대한 주위적 통제권을 부여할 이유가 있는지”를 질의했다. 또 발표자가 의회통제 강화의 방편으로 주장한 국회동의절차가, 다른 의원내각제 국가와는 달리 대통령제를 취하는 우리 헌법 체제하에서 허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또다른 토론자인 국회입법조사처 김선화 박사는 “현재는 입법권 위임이 예외라고 하기에는 너무 흔하게 위임이 있고, 법률보다는 시행령이나 규칙이 더욱 피부에 와닿는 실질적 규범이 되었다”면서 “입법부에서 행정입법의 체계정합성을 검토하는 절차를 실질화할 필요성에 대해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나아가 “실무적으로는 의원의 행정입법검토가 대개 전문위원과 법제실의 검토결과를 참고하는 형태이므로, 법제실에 충분한 전문성과 인력확보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대의제의 문제 ‘참여의 결함’에 있다고 보는 대안이론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은주 교수는 “행정과정에서 공론화위원회의 실험- 성과와 한계”를 발제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숙의적 행정과정의 한 방안으로 공론화위원회를 다수 운영한 바 있는데, 이 중에는 숙의적 결정에 반하거나 행정기관이 위원회 결정을 반영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갈등을 야기한 사례도 있다”고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론화위원회는 여전히 대안적 행정과정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전했다.
전통적으로 국가와 정부를 중심으로 행해지던 정책결정의 장은, 세계화와 정보화, 정부 실패 및 국가의 경제 위기로 인한 공공부문 개혁 필요성 등으로 인해 기존 정치이론에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에는 국가와 사회를 명확히 구별했다면, 오늘날 대두된 거버넌스 개념은 다수의 관련자들을 포함하는 결정과정 형태로서 아래로부터의 참여와 투입을 강조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전통적 대의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숙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가 등장한 바, 이러한 대안이론은 전통적 대의제가 야기한 문제 상황의 원인이 ‘참여의 결함’에 있다고 인식한다.
김 교수는 숙의 민주주의가 갖는 한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숙의 민주주의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행정기관은 언제나 그러한 결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는 헌법적 한계, 공론화에 적합하지 않은 사안이나 고도의 기술과 전문성 및 법 해석이 필요한 사안 등은 숙의민주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항적 한계, 숙의를 위한 의사결정 비용과 시간이 가져오는 낮은 효율성 문제, 평등한 참여와 투명성, 대표성 확보를 위한 과제 등이 그것이다.
김 교수는 “시민의 참여와 숙의는 ‘시민의 미덕’을 필수 요소로 하며 시민들 간 합리적 논증에 근거한 숙의를 통해 하나의 보편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법은 변화된 사회에 대응하여 새로운 제도를 마련할 수 있지만, 그러한 제도를 활용해 변화된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시민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 “큰 형성의 여지 있는 행정과정에서의 공론화, 법제화 필요하다”
제3주제의 토론자로 참여한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남철 교수는 “행정과정의 공론화는 입법과정에서의 공론화와 행정과정에서의 공론화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면서 “대의제라는 한계가 비교적 엄격하게 작동하는 입법과정에서의 공론화와는 달리, 행정과정에서의 공론화는 보다 큰 형성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 예로 ‘탈원전 공론화위원회’를 언급하면서, “(위원회는) 사전적 갈등해결제도 기능도 수행하고 국민참여를 통한 의견수렴방식이 훌륭했지만, 공법적 관점에서는 공론화 필요성, 위원회의 권한과 구성 등에 관한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아가 “어떤 문제에 대해 공론화할 것인지에 대해 정해져 있지 않으면, 단순한 정치적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또다른 토론자인 고려대 정부행정학부 계인국 교수는 “참여와 대의제가 서로 반드시 대립적이거나 반비례 관계인 것은 아니지만, 참여의 결과가 대의제를 동요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짚었다. 참여는 보충적인 기능을 이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계 교수는 “참여는 대표에 의해 중개되는 의회의 의사형성과 의사결정의 원천이 고갈될 위험에 처한 곳에서 그 민주적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렇다면 문제는 민주적 잠재력을 활성화시킬 영역과 방식이 무엇인지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참여가 필요하므로 시행 혹은 확대한다는 식의 논의는 참여가 민주적 의미를 가지기보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를 동요하거나 훼손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 “사법의 민주화, 견제력 확보 수준에 머물러야”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강일신 교수는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에 대해 발표했다. 강 교수는 “권위주의 정권 이후 사법권 독립 확보가 사법개혁의 목표였다면, 민주화로 인해 사법권이 독립성을 확보한 이후부터는 ‘사법의 민주화’가 사법개혁의 목표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강 교수는 “사법권 독립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 보장의 전제조건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민주주의원리에 따른 교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서도 “다만 민주적 참여의 제도화가 사법의 본질이나 사법 기능을 훼손하지 않도록 견제력 확보의 수준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강 교수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법관 임명시 사회 다원성을 반영한 자문위원회의 구성과 그를 통한 견제 △사법행정을 포함한 사법부 활동의 공개성과 투명성 강화 △자문적 의미를 갖는 국민참여재판제도 확대 △법관 논증의무 강화 및 법관 논증 비판을 위한 판결문 공개 등이다.
■ “우리 사법이 당면한 과제는 사법의 책무성과 투명성 확보”
제4주제의 토론자로 참여한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인호 교수는 “정치의 사법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사법의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는 길은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인 권력으로서의 ‘사법의 본질’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사법의 독립성과 책임성 강화를 위해 이 교수가 제시한 헌법적 대안으로는 △1,2,3심의 법원 조직구성을 수평적 구조로 전환하여 각 심급 법관 사이의 위계구조와 서열화 해체 △대법원장의 대법관제청권과 일반법관 임명권을 삭제하여 법관 조직의 탈중앙화·탈관료화 도모 등을 들었다. 아울러 “이러한 사법부 조직 개편은 법조일원화를 전제로 하고, 조직 재편에 따라 1,2심이 강화되면 상고허가제를 채택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또다른 토론자인 한국법제연구원 최유경 부연구위원은 “우리 사법의 경우 사법의 독립이 ‘외부로부터의 독립’ 중심으로 논의되어 온 결과, 사법행정권을 대법원이 보유함으로써 광범위한 법관독립·재판독립의 침해를 야기한 문제 및 사법관료화 현상을 강화시켜온 측면이 있다”고 짚으면서 “사법의 독립성, 책무성, 민주적 정당성의 개념을 분화하고 각각에 대한 헌법적 이론을 구성하는 한편 정치의 사법화 내지는 사법의 정치화는 또 다른 측면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부연구위원은 “헌법원리상 사법의 책무성이나 민주적 정당성이 사법의 독립 원칙에 우선하거나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 사법이 당면한 과제 앞에 중점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은 사법의 책무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역”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