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업법학회(회장 안성포 교수)와 한국상사판례학회(회장 박세화 교수)가 지난 8월 21일~ 22일, 이틀에 걸쳐 “이익충돌과 신인의무(信忍義務, fiduciary duty)의 재조명”이라는 대주제로 하계공동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기조강연 외 8개 주제에 대한 발제가 이뤄진 바 △노동이사제와 이사의 신인의무 △신인의무(충실의무)에 대한 비교법경제학적 고찰 △자산운용업자의 투자자 보호의무 △국민연금기금의 수탁자책임 원칙과 스튜어드십 코드의 상관관계 △해상법상 이해충돌의 제현상과 해결방안 △비의료인 개설 병원 의료비에 대한 보험금 지급의무(대법원 2018도1299 판결을 중심으로) △간접적 이해상충의 경계- 자기거래에 있어 특별이해관계인의 범위를 단서로 하여 △팬데믹 시대와 주식회사의 이사 등이다.
■ “현실에 부합하는 회사의 본질에는 ‘노동’ 포함된다”
노동이사제 도입 필요성을 주장한 충남대 법전원 정응기 교수는 주식회사의 본질을 “자본과 노동과 경영이 결합한 영리단체(사단)”로 보고, “주식회사의 구성원에는 주주뿐 아니라 근로자와 경영자도 포함하는 것이 더 현실의 회사에 부합한다”고 했다. 이러한 전제에서 “회사의 구성원인 근로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노동법을 통한 보호뿐만 아니라, 회사법 상으로도 근로자를 구성원으로 인식하고 구성원으로서의 일정한 권리를 가지게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정 교수는 “(회사법은) 주주와 달리 근로자에게는 경영자를 선임하거나, 감독할 수 있는 권한(감독 기관을 선임 및 직접 감독 권한 등)을 주지 않았다”며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주식회사가 영리활동(거래행위)을 하려면 내부적인 의사결정과 그 결정된 의사를 대내외적으로 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행 회사법(상법 제3편 ‘회사’)은 이러한 의사결정과 업무집행을 담당하는 이사들을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도록 정하고(상법 제382조 제1항), 근로자는 채권자에 포함시켜 보호하고 있다. 정 교수는 이에 대하여 “근로자의 이해관계는 회사 채권자보다는 오히려 주주와 더 유사하고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주주는 회사에 대하여 구체적인 권리로서 구체적 이익배당청구권, 구체적 잔여재산분배청구권을 갖는다. 이는 이미 발생한 구체적 채권으로서 근로자가 갖는 임금채권과 다를 바가 없다. 또 회사에 손해가 생길 때 근로자는 임금이 줄어들 위험과 해고의 위험이 증가할 수 있으며, 성과급과 퇴직금이 줄어들 위험이 있는 바, 이는 주주의 손해와 매우 유사한 간접적인 손해다. 즉 회사의 손해가 곧 주주의 손해인 것처럼 근로자의 손해로도 연결될 수 있다는 취지다.
정 교수는 “주식회사의 이사가 담당하는 회사의 의사결정과 업무집행에는 회사의 영리 활동 이외에도 이익분배에 관한 것을 포함한다”면서 “상법과 민법이 회사의 사무를 처리하는 이사들에게 지우고 있는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도,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뿐 아니라 이익을 분배함에 있어 중립적인 이해조정자로서의 역할을 공정하게 수행하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했다.
■ 노동이사제 입법례 비교
여러 국가의 회사법제는 주주들이 이사 또는 감사를 선임하도록 하고 있다. 정 교수는 이처럼 주주들이 경영기관 또는 감독기관의 선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선임된 경우를 ‘주주이사’라고 칭하며, 근로자가 참여하는 ‘노동이사’와 대비했다.
독일의 경우 감독업무를 수행하는 감독이사회(Aufsichtsrat)의 ‘감독이사’를 근로자가 선출하는 공동결정제도가 있다. 감독이사회는 회사의 업무를 집행하는 경영이사를 임명·해임하고 이들의 보수를 결정하며, 회사의 주요 경영사항(경영계획, 영업의 경과와 수익성, 중요한 거래 등)에 관하여 경영이사회의 보고를 받거나 보고를 요구하는 등 그 업무집행을 감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국은 유한회사와 주식회사에 설치하는 감사기관인 감사회가 3인 이상의 감사로 구성되는데(중국 회사법 제52조 제1항), 이 감사회가 주주대표와 종업원대표로 구성되고, 이 중 종업원대표의 비율을 3분의 1 이상으로 하면서 “필수적 참여”를 규정하고 있다.
국내 노동이사의 실제를 보면, 서울특별시 조례를 통하여 산하 공사나 공단, 출자·출연기관에 임명되는 ‘근로자이사’가 있다. 근로자이사는 5년 이상 재직한 소속 근로자 중에서 시장 또는 기관장이 임명하는데, 근로자이사는 다른 비상임이사와 동일한 권한과 의무 및 책임을 지고, 근로자이사가 권한을 행사할 때에는 시민 복리 증진 및 공익성이 우선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근로자가 경영기관을 선임하는 입법례는 드물지만, 정 교수에 따르면 이에 해당하는 서울특별시 ‘근로자이사’ 이외에도, 독일의 공동결정법이나 몬탄공동결정법에 따라 경영이사회에 두는 ‘노동이사’가 있다. 중국의 유한회사와 주식회사의 ‘이사회’에 종업원대표를 두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하는데, 감사기관인 ‘감사회’의 경우와는 달리 필수적 참여가 아니며 정관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항으로 되어 있다.
■ “노동이사제, ‘오너 경영’ 통제기능 기대할 수 있어”
연세대 법전원 손창완 교수는 “회사지배구조에 관한 지배적인 이론인 ‘주주중심주의 내지 주주지상주의’를 바탕으로 하여서는 노동이사제를 논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주주지상주의란 “회사의 목적은 주주의 이익 극대화이고, 회사의 궁극적인 지배권은 주주에게 있다”는 이론인데, 이 주주지상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 “이해관계자주의”다.
이해관계자주의는 “주주 이외에 회사에 이해관계를 갖는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손 교수는 “이해관계자에는 직원, 채권자, 공급자, 소비자, 지역사회, 정부 등을 포함하여 회사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는 모든 집단에까지 그 범위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해관계자 지배구조에서는 노동이사제가 이론적으로 충분히 수용 가능하다”고 했다.
노동이사제 도입의 현실적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기업과 사기업으로 구분하여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공기업의 경우 그 설립목적에 공공성이 인정된다는 점에서 노동자를 포함한 이해관계자의 경영참여가 수월하게 인정될 수 있으나, 사기업의 경우 경영감시기능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인정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손 교수는 “그간 회사법은 우리나라 회사지배구조의 특징인 대주주가 경영을 지배하는 소위 ‘오너 경영’을 통제하기 위하여 사외이사제도, 감사 선임시 의결권 제한 등 여러 수단을 강구하여 왔지만 실효성이 없었는데, 노동이사제는 이러한 오너 경영 통제 장치로 기능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전북대 법전원 김성진 교수는 “회사가 망하면 주주는 돈의 일부를 잃지만 근로자는 생존기반을 잃는다”면서 “근로자의 기업에 대한 이해관계를 주주에 대응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근로자의 경영참여 및 감독 권한 향유 필요성을 이끌어 내면서 노동이사제 도입을 주장한 발표 내용에 공감한다”고 했다. 다만 그는 “경영참여를 노동법이나 노동조합이 담당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는 발표자의 시각은 ‘노동은 기업운영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없으니 경영에 대한 참가도 인정하지 말아야 된다’는 주주지상주의에 경도된 대법원의 논리와 같은 것”이라며 동조하지 않았다.
한편 김 교수는 “노동이사로 임명된 자가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경영상 해고나 기업의 신사업진출을 반대하는 경우, 혹은 기업의 성장세나 주주배당에 비해 근로자들의 임금인상폭을 높이자는 주장을 하는 경우, 이사의 신인의무에 위배된다고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노동이사가 근로자에게 유리한 경영상의 결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섣불리 이사의 신인의무에 위배된다는 판단을 해서는 안 되고, 구체적 사안, 구체적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판단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 국민연금기금의 수탁자책임 원칙과 스튜어드십 코드
1973년 국민복지연금제도에 기원한 국민연금기금은 전국민의 노후보장의 핵심재원으로서, 2020년 5월 현재 적립금 규모가 739.3조원에 달한다. 일본의 공적연금기금과 노르웨이 국부펀드에 이어 세계 3위의 대규모 공적기금으로 성장했다.
한국법제연구원의 박기령 연구위원은 “이러한 국민연금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국민연금기금이 대규모 공적 연기금을 운영하는 기관투자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국민연금기금의 수탁자책임원칙’ 시행을 시작으로 한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 운영의 활성화”라고 짚었다.
박 연구위원은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하여 “수탁자 책임의 일환이자, 보유주식 의결권 행사를 포함한 주주권 행사를 요구하는 자율규제 형식의 기관투자자 행위준칙”이라고 풀이하면서 “영국에서 시작된 스튜어드십 코드는 나라별로 도입 배경이 다른데,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 자본시장에 대한 저신뢰와 재벌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지배구조 개선 및 오너리스크 등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구체적으로는 2016년 민간 주도로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면서 국내 자본시장의 최대 투자자인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수용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다가, 2018년 7월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원칙”이라는 명칭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수용하여 2019년 12월 27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됐다.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는 ①수탁자 책임에 대한 정책 수립 및 공시 ②이해상충 방지 정책 수립 및 공시 ③투자대상회사에 대한 모니터링 정책 ④관여활동(내부지침) 정책 ⑤의결권 행사 정책 수립 및 내역 공시 ⑥의결권 행사 및 수탁자 책임 활동 보고 ⑦역량 및 전문성 강화 등 7개의 핵심원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 연구위원은 “2020년은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원칙’, 즉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가 본격적으로 운용이 시작되는 첫 해이며, 오는 2020년 말에 개최될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과연 기업의 지배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한편 “국민연금이 수탁자 책임원칙을 기반으로 향후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 SRI)를 어떻게 주도할 것인가에 대한 쟁점 역시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 전통적 신인의무 적용되지 않는 관계를 포섭하기 위한 단어, ‘steward’
세계 최초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제정한 영국은 그 기원을 1992년 Cadbury 보고서로 본다. 박 연구위원에 따르면 이 보고서에서는 이사의 역할 및 책무와 관련하여 기존에 이사를 표현하는 법률용어로 사용했던 fiduciary라는 단어 대신 steward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수임자로서의 의무(fiduciary duty) 대신 스튜어드십을 사용한 이유는 신임관계(fiduciary relationship)에 있지 않은 경우도 포섭할 수 있는, 보다 광범위한 범위 설정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예컨대 자산운용자와 자산보유자의 관계는 신인의무로 포섭할 수 있고, 자산소유자와 수혜자 또는 연금수령자의 관계도 충실의무의 범위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만일 자산운용자가 중간단계에서 의결권 자문회사를 이용할 경우 자산소유자와 의결권 자문회사는 직접적인 접촉이나 위임관계가 없게 된다.
이처럼 캐드버리 보고서가 나올 당시에는 이미 주식회사의 규모가 커지고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주주의 역할이 사실상 형해화되어 점차 기관투자자와 의결권 자문회사들이 주목받고 성장했다. 여기서 영국법상 전통적인 법리인 신인의무 적용이 애매한 기관투자자와 자문회사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보다 포괄적인 단어인 steward가 쓰인 것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핵심 내용인 수탁자의 충실의무는 우리 신탁법이나 자본시장법, 회사법에 이미 법제화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국민연금법의 경우 보건복지부 장관의 신의칙이나 훈령인 국민연금기금운용규정에서 선관주의의무를 정하고 있다. 하지만 박 연구위원은 “이것으로는 국민연금기금 운용의 수탁자 지위 및 책임을 인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으며, 법리상 선관주의의무나 충실의무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는 “스튜어드십 코드는 일종의 연성규범이기 때문에 기금운용에 있어서 투자원칙이나 기준을 제시하는 정도”라면서 “국민연금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확정된 만큼, 장기적인 차원에서 국민연금법 개정을 통해 국민연금기금 운용주체의 수탁자로서의 지위와 책임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근거법령을 두도록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영국 2020 스튜어드십 코드, “ESG 명시한 것은 획기적”
이 주제의 토론자로 나선 인하대 법전원의 손영화 교수는 “우리나라는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불거진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국민연금을 보호하고,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며 논의의 물꼬가 텄다”고 전하는 한편 “특히 문재인 정부가 2018년 초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을 추진하면서 국민연금의 참여가 본격화됐다”고 소개했다.
손 교수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의 핵심 내용은, “기금 운용의 독립성 강화를 위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신설과, 지분 보유기업에 대한 주기적 점검 및 강화된 주주권 행사” 등이다. 특히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산하에 비상설 기구인 ‘수탁자책임위원회’를 신설함으로써 정치·경제 권력이라는 외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기대도 받고 있다. 손 교수는 그러나 “당시 가장 관심이 집중됐던 ‘사외이사 및 감사 후보 추천’과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 등 국민연금의 경영권 참여’ 등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어 업계에서는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올해 개정된 영국의 스튜어드십 코드(The UK Stewardship Code 2020)는 스튜어드십의 정의를 “경제, 환경 및 사회에 있어서 지속가능한 편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고객 및 수익자의 장기적인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책임 있는 자본의 배분, 관리, 감독”이라고 명시했다. 손 교수는 “이는 서명기관이 고객이나 수익자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 자체가 경제, 환경 및 사회의 지속가능한 편익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라면서 “스튜어드십의 정의가 확장되어 ‘지배구조’뿐 아니라 ‘환경’과 ‘사회’를 포함한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의 고려가 투자자에게 요구되게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번 개정이 이 ESG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획기적”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