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지난 10월 27일, 제27차 남북관계 전문가 토론회를 열고 “남북 교류 협력 활성화를 위한 과제”를 논의했다. 이틀에 걸쳐 진행된 이번 토론회에서는, 둘째 날에 남북 문제에 정통한 대표적인 법률가들이 모여 ‘법제정비’ 분야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날 발제는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가 맡았으며, 토론자로는 권은민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김소윤 연세대 의학과 교수, 박원연 법률사무소 로베리 대표변호사, 선병주 법무법인 명석 변호사, 유욱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이찬호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이형철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 최기식 법무법인 산지 변호사, 함보현 법률사무소 생명 대표변호사가 참여했다.
■ “30년 된 통일 법제 개선하고 통일정책 법제화해야”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법제개선 및 발전방향”을 주제로 발표한 임성택 변호사는 “남북관계의 핵심은 법치주의”란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는 “이 분야를 10년 넘게 연구해 온 법률가로서, 통일정책을 법제화하고 법치주의에 따라 추진해야만 지속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여러 차례 정부에 법안을 제출하거나 의견을 건의해 왔다”면서 “(하지만) 그동안 한 걸음 앞으로 내딛기조차 힘들었던 건 남북관계가 법치주의에 기반하지 않고 정치 혹은 통치행위의 차원에서만 다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통일 법제를 현실에 맞도록 개선하고 이러한 법에 따라 통일정책을 추진할 때 남북관계에도 진전이 있게 된다”면서 “현재의 법들은 30년 전 제정되어 이미 낙후되었을 뿐 아니라, 향후 변화를 거듭할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까지도 반영하기 위해서는 법제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의 기본법으로서는, 5·24조치와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치 등에 의해 사문화됐다고까지 평가되는 ‘남북관계발전법’의 위상강화가 필요하다는 게 임 변호사의 주장이다.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구성된 ‘남북관계발전위원회’는 거의 운영되지도 않았는데, 임 변호사는 “남북관계발전위원회의 위원장을 국무총리로 승격하고, 각부 장관급 정부위원과 민간 원로들을 참여시켜 위상을 강화해야 하며, 남북관계기본법에는 남북관계 정책추진을 통할·조정하는 통일부의 역할과 다른 부처와의 관계도 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 “남북교류협력 활성화 위한 부문법 제정과 대북투자 위험보장장치 필요”
남북관계의 기본법이 ‘남북관계발전법’이라면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기본법은 ‘남북교류협력법’이 된다. 임 변호사는 “남북교류협력법은 장절을 구분하고, 기본원칙 규정을 도입하는 한편 준용·위임규정을 정비하며, 교류협력의 양적·질적 변화를 반영하는 등의 전면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현행 법률은 교류협력을 촉진하고 추동하는 성격보다 규제하는 성격이 더욱 강한 측면이 있는데, ‘방북절차 간소화, 남북 주민의 우편·통신 교류 지원, 북한주민 접촉신고의 폐지 또는 완화(인터넷 접촉 허용), 북한주민 남한방문절차의 활성화’ 등을 법에 담아야 한다는 게 임 변호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경제, 사회문화, 인도적 지원 등 다양한 유형의 협력사업 간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규정하여 대규모 협력사업(SOC 개발, 신도시 개발, 공단 개발 등)을 전제로 한 규정이 없는 것도 문제다. 나아가 개성공업지구지원법에 준하는 교류협력 지원제도와, 대만의 해기협회와 유사한 반관반민기구 성격의 남북경협공사를 설립하는 방안도 고려되어야 한다.
특별한 규율이 필요한 문제는 부문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데, △남북경협공사 설치와 북한 인프라 개발 및 투자 규정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남북경제협력에 관한 법률” △인도적 지원을 위한 협력사업 등 북한주민의 생존권 및 인권과 관련된 내용의 “북한 개발협력 및 인도적 지원에 관한 법률” △남북교류가 재개되었을 때 특구에서의 경제협력에 관한 “남북경제특구 지원에 관한 법률” △감염병 시대에 특히 필요한 “남북보건의료 교류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 등이 거론됐다.
임 변호사는 대북투자 위험보장장치 마련도 주문한 바, 귀책사유 없이 정부를 신뢰하고 대북사업을 하다가 희생당한 국민에게 손실을 보상하는 ‘손실보상 법제 마련’, 사업자가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하는 ‘경협보험제도 마련’, 투자활성화를 위한 ‘투자보증제도 마련’이 그것이다. 임 변호사는 특히 투자보증제도와 관련, “세계은행의 국제투자보증기구(Multilateral Investment Guarantee Agency: MIGA)를 활용하거나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MIGA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북투자를 보증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 “남북 관계는 정부의 일방적 결정 아닌 국민 의사에 따라 추진될 영역”
권은민 변호사는 통일정책의 법제화 및 법제 개선 필요성에 공감하며 “남북관계에 정무적 판단이 필요한 사항이 많지만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 등 참조사례가 있고, 절차와 집행의 측면에서도 법률이 필요하고 유용하다”고 하는 한편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남북정상회담, 개성공단 운영 등 다수의 경험과 국제사회의 인식 등 변화된 현실을 반영한 법제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교류협력의 상대방인 북한과 함께 논의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대표사무소 설치, 대규모 협력사업을 위한 제도 마련, 남북경협지원센터 설립, 경협사업 상담회사 등에 대해 북한과 협의하여 상호간 법제를 어떻게 변화하고 절차를 일치시킬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원연 변호사는 ‘북한 주민의 남한방문’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북한 주민의 법적 지위는, 지난해에 있었던 북한 선원 북송사건 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아직 논란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서 “북한이탈주민을 제외한 (탈북 의사 없는) 북한 주민의 경우, 관계 법률을 보충 개정하여 ‘외국인에 준하는 지위에 있는 자’로 대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필요성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유욱 변호사는 “남북경협 활성화 시대에 대비하여 지속적, 체계적, 전문적 추진을 위한 남북경협공사 설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면서 “‘북한 KOICA’를 만들어 남북경제협력사업을 국제적 개발협력사업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고, 현재 KOICA가 관장하는 예산이 1조에 조금 미달하는 수준인데 남북경제협력이 대규모로 진행될 경우 남북협력기금은 그 몇 배에 달하게 될 것이므로 KOICA 규모 이상의 지원조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형철 변호사는 “남북관계는 정부나 전문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벗어나, 국민 의사에 기반을 둔 실질적 법치주의가 그 어느 분야보다 더 필요하다”면서 “남북관계의 방향, 가치, 원칙에 대해 국민의 참여와 토론, 의사수렴 과정을 이를테면 ‘사회적 대화’ 등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손실보장 법제, 경협보험 제도 마련 등은 국민 세금과 같은 공적자금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방식은 될 수 없고, 공적자금으로 얼마만큼 위험을 보장해 줄 것인가는 결국 그 경협사업이 얼마나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는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사중재 등 분쟁해결절차를 구체화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최기식 변호사는 정책의 법제화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우리가 정책을 법제화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에서 다른 태도를 취하며 우리 법제에 맞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게 한다면, 우리만 오히려 우리가 만든 법에 얽매여 그때그때 융통성이나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법에 정해진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게 되는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교류협력의 중요성 못지 않게 국가안보의 측면도 고려해야 하고, 튼튼한 안보가 전제될 때 교류협력도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북한주민접촉신고를 폐지 또는 완화하거나 인터넷 접촉을 허용하는 것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함보현 변호사는 “현행 남북 교류협력 법제를 들여다 보면 여전히 안보 중심의 대북관과 정부의 규제 프레임이 짙게 깔려 있다”면서 “이는 국가보안법 중심의 법 체제에서 남북교류협력법을 예외로 두고, 교류협력을 언제라도 반국가 활동을 할 수 있는 ‘위험요소’로 보는 시각”이라고 평했다. 그는 “민간과 지자체의 교류·협력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행위마다 병렬적으로 관리하기보다는 포괄승인을 통해 규제를 최소화하는 방향의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하는 한편 “인도적 지원이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와 ‘초법적 조치’에 따라 위축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도적 지원과 개발협력 사업은 정권이 바뀌어도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도록 특별법 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