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유명 영화제작자였던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사건은 2017년 10월 미국 뉴욕타임스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후, 할리우드 배우들로부터 유사한 제보가 잇따르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는 각계각층 여성들이 성범죄 피해 사실을 밝히거나 성범죄를 성토하는 내용의 글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올리며 ‘Me Too’라는 해시태그(#MeToo)를 달아 연대감을 드러내는, 전세계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번 1심 판결에도 많은 이목이 집중됐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연수 중인 조재헌 판사(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는 지난 10월 발간된 ‘해외사법소식(사법정책연구원이 제공하는 해외연수법관 보고자료) 제129호’에 ‘하비 와인스타인(Harvey Weinstein) 사건의 1심 판결 선고’를 게재했다. 조 판사는 “우리 사회 전반에도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으며,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담론으로 자리잡은 만큼 이 사건의 경과와 주요 쟁점을 살펴보고 시사점을 얻는 작업은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 불기소였던 사건...뉴욕타임스 보도와 잇따른 증언이 기소 견인
조재헌 판사에 따르면, 재판 전까지 사건의 경과는 크게 ‘2015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혐의에 대한 뉴욕 검찰의 불기소 처분→2017년 뉴욕타임스 및 뉴요커 지의 기사 보도→2018년 수사 및 기소’다. 뉴욕 검찰의 불기소 처분으로 덮힐 뻔했던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의 취재와 보도로 인해 전세계적 관심을 획득하면서 기소로까지 이어졌다는 평가다.
최종적으로 정리된 와인스타인에 대한 공소사실은 ①2018년 와인스타인 컴퍼니의 제작보조인 미리암 할리에게 강제로 구강성교를 하게 하였다는 점에 관한 1급 성범죄 혐의(first-degree criminal sexual act) ②2013년 배우지망생 제시카 만을 강간하였다는 점에 관한 1급 및 3급 강간 혐의(first-degree rape and third-degree rape) ③미리암 할리, 제시카 만에 대한 각 약탈적 성폭행 혐의(predatory sexual assault)다.
이 중 ‘약탈적 성폭행 혐의’란 두 명 이상을 상대로 중범죄(felony)에 해당하는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와인스타인은 과거 미국 유명 드라마 출연 배우인 애나벨라 시오라를 강간하여 1급 강간죄를 저질렀음에도 다시 위와 같은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았다. 따라서 위 ③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과거 애나벨라 시오라를 강간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했다.
한편 공소사실이었던 와인스타인의 마케팅 담당 직원인 루시아 에반스에 관한 강제 구강성교 부분은 후에 별도로 기각됐는데, 그 이유는 담당 수사관이 에반스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할 만한 증거를 확보했었음에도 이를 검사에게 알리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에반스의 한 친구로부터 나온 “에반스가 배역을 따내기 위해 자의적으로 구강성교를 했다고 얘기한 일이 있다”라는 내용의 진술이다.
■ 배심원의 판단...“사건 전후 상황보다 사건 당일에 집중”
재판에서 검사는 “와인스타인이 피해 여성들을 자신의 지배영역 아래에 두고, 영화계에서 그들의 경력을 좌우할 수 있는 자신의 영향력을 악용하여 공소사실과 같은 성범죄들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반면 변호인은 “고소인들은 자신들의 경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 와인스타인과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했다”며, 특히 문제의 성관계 후 여러 해가 지난 뒤, 와인스타인의 성범죄에 대한 뉴스 기사가 나온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성관계에 동의가 없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점 등을 지적했다.
이 사건은 배심재판(jury trial)으로 진행됐는데, 조 판사에 따르면, 미국 배심재판의 경우 판사는 증거법과 절차법적 측면에서 재판 진행과 양형을 담당하고, 실체관계에 관한 판단, 즉 핵심 증인의 신빙성 판단을 비롯한 사실인정 및 그에 따른 유무죄 판단은 배심원단이 담당한다.
배심원 평결은 2020년 2월 24일 발표됐다. 사건의 쟁점은 ‘와인스타인과 여성들 사이의 성관계가 합의에 기초한 것이었는지’다. 배심원단은 ①미리암 할리에 대한 강제 구강성교에 관한 1급 성범죄와 ②제시카 만에 대한 3급 강간죄를 유죄로 판단했고, 가장 중한 혐의로서 무기징역이 선고될 수 있었던 ③2건의 약탈적 성폭행(predatory sexual assault)은 시오라가 한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무죄로 판단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배심원단은 미리암 할리의 증언이 매우 상세하여 신빙성이 높고, 와인스타인 성범죄 패턴의 유사성 또한 진술을 뒷받침한다고 보았다. 그녀가 사건 이후 와인스타인과 관계를 이어간 것은 직업과 경력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애나벨라 시오라의 증언에 대해서는 그녀가 진술한 내용이 다른 와인스타인 성범죄들과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 27년 전 사건에 대한 기억이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시오라가 그 무렵 신경안정제에 잠시 중독된 적이 있었다는 점 등에 의해 신빙성을 배척했다.
배심원단이 가장 판단에 어려움을 겪은 부분은 ②제시카 만에 대한 혐의였다. 특히 제시카 만은 그녀가 주장한 사건 이후에도 와인스타인과 여러 해 동안 합의에 따른 성관계를 맺었고, 친구에게 와인스타인을 양아버지 또는 소울메이트라고 말하기도 했다. 배심원 간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국 배심원단은 “사건 전후의 상황보다는 사건 당일 와인스타인과 그녀의 관계에 비추어 그녀가 성관계에 동의하였을지에 집중하였고, 그 결과 당시 동의는 없었다”라고 판단했다. 다만, 배심원단은 그녀가 문제의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당시 어떠한 물리력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1급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아 ‘물리적인 강요(forcible compulsion)’가 요구되지 않는 3급 강간죄를 유죄로 판단했다.
■ “피해자다움 엄격하게 따졌던 우리 판례에 주는 시사점 크다”
뉴욕주 1심 법원은 와인스타인에 대하여, 미리암 할리에 대한 1급 성범죄에 징역 20년, 제시카 만에 대한 3급 강간죄에 징역 3년, 합계 징역 23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배심원단이 유죄로 판단한 부분들의 처단형이 징역 5년 이상 29년 이하였음을 고려하면 이는 상당히 무거운 형이라는 게 조 판사의 설명이다. 이에 대해 와인스타인의 변호인은 “살인자보다도 무거운 이런 형량은 대중의 압력에 의한 결과이지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조재헌 판사는 “할리우드 영화계와 미국 문화계에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와인스타인에 대항하여 용기 있게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처벌을 구한 여성들 덕분에 와인스타인의 성 추문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었다”고 평하며 “이 사건 1심 판결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권력 관계에 기한 성범죄를 전보다 엄벌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 중형을 선고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법현실에 대해서는 “과거엔 권력 관계에 기한 성범죄 유형의 성범죄 처벌이 쉽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그 원인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 시 권력 관계라는 특수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왜 사건 이후에 바로 퇴사하거나 피해 사실을 고소하지 않았는지’, ‘왜 사건 이후에도 가해자와 연락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지’ 등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엄격하게 따진 결과 유죄의 입증이 부족하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 판사는 “우리 법원에서도 향후 권력 관계에 기한 성범죄 또는 위력에 의한 간음 유형의 사건이 계속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이는바, 와인스타인 사건 상급심의 판단과 기타 유사 사건에 대한 각국 법원의 추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