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사소송법학회(회장 정웅석 교수)가 지난 2월 19일, 제75회 월례세미나를 통해 학회의 지난 10년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10년을 설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세미나는 前 학회장들이 지난 10년 회고를 비롯한 제언을 하고, 현 집행부가 향후 10년의 계획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학회는 “형사사법 제도가 급변하는 현실에서 형사소송법을 주 연구분야로 하는 국내 대표적인 최대 규모 형소법학회로서, 견실하게 학문연구를 하면서도 바람직한 형사정책 정립에도 기여하고자 하는 학회원들의 뜻과 의지를 서로 교류하기 위해 이번 세미나를 기획했다”고 전했다.
학회는 올해 새로이 학술상을 제정하여 최우수 연구논문에 상금 1천만원을 수여하기로 하고, 청소년 대상 형소법 책 출간을 기획하는 한편, 새로 출범한 ‘예비법조인 교류위원회’를 통해 로스쿨에 재학 중인 학생들 중 형사소송법에 관심있는 학생들을 일찍부터 발굴하여 토론 등 학회 활동에 참여시키면서, 이들의 학자 또는 실무가로서의 성장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 “번역서 발간 등 국제학술교류와 유튜브 활용 통한 국민홍보 등 필요하다”
조균석 고문(이화여대 법전원 교수)은 “우리 학회는 형사소송법의 바람직한 방향을 정립하고 선진 제도 정착에 기여하기 위하여, 또한 사회의 민주화와 국민 의식수준 향상에 발맞춰 그에 걸맞은 새로운 형사법적 패러다임 제시와 보편적 가치 및 정의를 실현하는 형사사법절차를 구현하기 위해 창립되었다”고 했다. 이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창립 12년이 된 우리 학회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형사사법제도의 현실은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된 형국”이라며 “우리 학회의 노력이나 바람과는 달리 현재의 형사사법제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을 향하는, 후진적 제도가 되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검찰에서 수사를 받는 중이고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중인 사람들이 모여서 형사사법제도를 뜯어고칠 수 있는, 이런 일이 가능한 나라가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면서 “수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찰청을 중대범죄수사청과 기소청으로 쪼갠다니, 머잖아 재판이 마음에 안 든다고 법원을 공판법원과 선고법원으로 쪼개야 한다고 할지 모르겠다”고 쓴소리를 했다.
나아가 “이 제도, 저 제도를 짜깁기 해서 대륙법계도 아니고 영미법계도 아닌 K법계 형사사법제도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우리 학회는 이런 현실을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얼마든지 기회로 삼고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서 “이런 때일수록 학회는 학회 창립 때 내건 기치에 충실하게, 바람직한 형사소송절차와 선진적인 형사사법제도, 보편적 가치 및 정의를 실현하는 형사절차를 위한 연구를 열심히 해서 진정한 개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고문은 학회를 위해 구체적으로 네 가지를 조언했다. △역량 있는 회원들을 결집하여 가칭 ‘바른형사사법 연구회’를 구성할 것 △각 분야 원로가 사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일본처럼 우리도 형소법 분야 원로를 발굴하고 선정하여 그 이론을 조명하고 돌아보는, 이를테면 학술지 특집호 발간과 같은 작업을 고려할 것 △형법 교과서가 번역되어 중국, 일본에서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학회가 주축이 되어 형소법 교과서를 영어·일본어·중국어 정도로는 번역을 하여 외국에서 출간을 하고, 이를 통해 좋은 것이든 좋지 못한 것이든 우리 법제도와 이론, 현실을 외국에 알리며 학문적으로 교류할 필요가 있다는 점 △바람직한 형사법제도에 대한 국민 이해를 높이기 위해 요즘 많이들 활용하는 유튜브 컨텐츠를 쉽고 재밌게 만들어서 홍보할 것 등이다.
■ “형사절차상 인권보장 논의를 핵심으로 하는 앞으로의 10년 되어야”
한명관 고문(법무법인 바른 변호사)과 심희기 고문(연세대 법전원 교수)은 비슷한 의견을 냈다. 학회가 정치적으로 특정한 입장을 지닌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검경수사권 조정 등 주제보다는, 형사소송법이 추구해야 할 본질적 가치인 ‘실체적 진실발견’과 ‘인권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논의에 더 몰입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한 고문은 “정치권이 대립하고 있는 주제에 대해 옳다, 아니다 하는 식으로 학회가 바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우리 형소법이 상대적으로 약한 인권보장과 관련된 논의를 좀 더 사회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게 노력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면서 “프랑스와 같이 피고인의 방어권, 피고인 인격 존중, 변호인 조력권, 언어통역, 무기대등, 법 앞의 평등 등을 법에 규정하고 대심절차를 강화할 방안 등을 논의하는 앞으로의 10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한 유튜브 활용을 제안한 조균석 고문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학회가 계속 발전하고 있고, 국민의 권리 신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국민이 알 수 있도록, 형사절차에 대한 내용으로 유튜브 등을 제작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고민해 보면 좋겠다”고 했다.
심 고문 역시 “이상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학회가 국가인권위원회보다도 더 인권옹호적인 논의와 연구를 하고 실천 사례를 만드는 학회로 알려져야 하는데, 한동안 누구에게 수사권을 주니, 수사권과 기소권을 어떻게 해야한다느니 하는 데에만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면서 “국민 속에서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고 홍보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 “학자는 권력자가 아니지만, 결국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학문”
이상원 고문(서울대 법전원 교수)은 “본디 권력자(왕)가 비권력자를 통치하기 위해 만든 법이, 근대에 와 그 주체가 국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국민이 직접 만들어 직접 그 통치 아래 있게 된 게 법’이라는 이론적 토대가 확립되었다”면서 “(이는) 절차적으로 민주성, 즉 다수결의 원칙을 전제로 한다”며 법의 의미를 천천히 되짚어 봤다. 그는 “국민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대표자들에게 법 제정을 맡기게 됐는데, 국민의 대표자라는 국회의원이 국민의 의사에 따라 법을 만들지 않고 자신의 뜻에 따라 법을 만들 때 문제가 생긴다”며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이때의 법은 권력자가 비권력자를 통치하기 위해 만든 근대 이전의 법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 고문은 또한 “국민의 대표자 간 충분한 토론과 다양한 의견 교류가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 다수결에 따라 제정된 법도 ‘민주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의견을 보이면서 “국민이 만들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은 법에 국민이 따라야만 하는, 반법치주의적인 현실이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고 경계했다.
그는 다수결의 원칙이 법치주의와 충돌하는 지점도 지적했다. “소수의견은 항상 무시되어도 되는지, 다수결에만 의한다면 그에 따라 제정된 법이 내용에서 정당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이를 “‘정당한 법’보다 ‘수적 다수’가 우위에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가 연구하는 법은 2021년에만 타당한 법이라거나 한국에서만 타당한 법이 아니”라면서 “통시적, 통섭적 시각을 가진 연구자가 더 많아야 한다”고 말했다.
학회가 사회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응해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하여는, “황혼이 되어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비행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세상의 혼돈이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에야 목소리를 내는 쪽이 맞는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학자들은 권력자가 아니지만 결국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학문이므로. 우리 학회는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상태에서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활발하게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아가 “향후 10년은 형사소송을 중심으로 연구하면서도 인문학이나 예술, 사회과학 등 타학문에도 열려 있는 학회, 한국의 법학을 세계에 알리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학회, 오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며 학문후속세대를 서포트하는 학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한편, “국내 많은 학회 중 우리 학회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연구한다는 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