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이 지난 2월 19일, 대한변호사협회와 공동으로 “2019-2020 이주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보고대회(웨비나)”를 개최했다.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은 이주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법률가와 연구자들이 모인 네트워크로, 지난 2017년 10월에 창립하여 정기적으로 이주인권 현안을 논의하고 공동실천을 해오고 있다.
이번 보고대회에서 보고된 판결은 디딤돌 판결이 10건, 걸림돌 판결이 5건, 주목할 판결이 11건이다. 이주인권에 긍정적 역할을 한 판결은 ‘디딤돌 판결’로, 부정적 역할을 한 판결은 ‘걸림돌 판결’로, 긍정적‧부정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거나 계속 주시할 필요성이 있는 판결은 ‘주목할 판결’로 선정됐다. 선정 기준은 ①판결의 영향력 ②이주민 관련 법령에 대한 이해 ③이주인권에 대한 이해 ④발전성 ⑤구체적 타당성 등 5가지다.
선정에는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 조아라 변호사, 김영화 시사IN 기자, 김철효 전북대 사회과학연구소 박사, 송원 경기도 외국인 인권지원센터 변호사, 윤영환 이주민센터 친구 대표(변호사), 이상민 대한변협 난민이주외국인 TF 위원장, 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가 참여했다.
■ 252만명 넘어선 한국의 이주민, “차별없는 제도운영과 사법판단이 사회적 비용 절감”
선정된 판례들의 총평을 발표한 윤영환 변호사는 “한국의 제도 자체가 낯설고 언어와 문화 차이로 인해 제도의 실질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주민들은, 선주민에 비해 쉽게 부당함이나 억울함을 당할 수가 있다”며 “이들의 특수한 조건과 상황을 반영하여 사법제도가 설계되고 운영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추가 비용을 야기하는 듯 보일 수도 있지만, 2020년 기준 252만명을 넘어선 이주민들에 대한 제도 운영을 개선 없이 엉성하게만 둘 경우, 중장기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회적 비용과 후과는 훨씬 더 클 거라는 지적이다.
윤 변호사는 “이주민들의 삶과 노동은 더이상 오로지 그들 개인적 이익과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한국사회의 유지와 존속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는 인식을 보이면서, “이주민에 대해 차별없는 사법적 판단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주민들이 언어나 제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사법기관에의 접근을 포기함으로써 억울하고 부당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인권에 기반한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도입되어 운영되고 있는 제도적 장치들은, 그 운용이 실질적으로 목적과 취지에 따라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에 따르면, 사법절차에서의 통번역의 부정확성, 출입국 행정의 자의적이고 형식적인 재량권 행사, 이주민 체류의 일시성, 사회적 조건의 열악함에서 비롯되는 부실하고 강압적인 조사와 행정은 여전히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주민을 한국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의식적 편견과 배제가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이주민 인권에 영향을 미칠 하나의 판결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는 “연관된 주체들이 각자 자신의 입장과 지위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기 위해 서로 부딪치고 때로는 대화하면서 규범을 발견하고 결론을 형성한다”고 전하면서, “이 과정에는 국가와, 처분을 한 행정청, 수사기관, 지방자치단체, 사건의 당사자, 당사자의 소송대리인(변호사 등), 언론, 기업(사용자), 시민인권단체 등이 참여하며, 대개 해결책은 사건의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안정성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찾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기서 매번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법원의 사법적 판단”이라며 “판결에 대한 활발한 토론과 평가는 많이, 그리고 깊이 있게 이루어질수록 좋고, 이러한 과정의 수혜자는 종국적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라고 강조했다. 법원 판단은 권위적이거나 일률적‧형식적인 행정실무 관행을 변화시킬 수 있고, 입법에 영향을 미쳐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기도 하며, 좋은 판결은 다른 법관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나아가 당사자들과 사회단체들에게도 행동과 전략적 판단의 지침 또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 폭넓은 재량 인정됐던 출입국 행정 관행, “법원의 바른 판단으로 서서히 변화”
이주민이 한국에서 맞는 첫 관문인 출입국 행정과 관련해서는, 주무부처인 법무부가 내부 지침을 무관용원칙에 따라 형식적으로 적용하여 출입국 행정처분을 하는 것이 늘 문제가 되어왔다. 출입국제도가 가지는 국가적 중요성과 위상을 이유로 출입국 행정에는 상당한 재량이 부과되어 있는데, 기존의 사법판단은 출입국 행정의 재량을 폭넓게 인정하여 이주민이 처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정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어 걸림돌 판결로 다수 선정되었다. 이 가운데 비례의 원칙 등 재량권 행사의 적법성 판단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심리를 통해 처분의 위법성을 인정하여 나온 판례들이 디딤돌 역할을 하면서, 출입국 행정 관행에 변화를 주고 있다.
이번에 선정된 이 분야의 디딤돌 판결로는 ①「결혼이민자 가족체류 관리지침」에 따라 결혼이민자 가족에 대한 방문동거(F-1) 체류자격허가요건을 결혼이민자(혼인귀화자)의 가족 중 ‘여성 혈족’으로 제한하여 ‘남성 혈족’의 체류자격 변경신청을 불허한 처분은 위법하다고 본 판결(서울고등법원 2019. 9. 27. 선고 2018누78253 체류기간연장등불허결정취소) ②「결혼이민자 가족체류 관리지침」에 따라 결혼이민자의 부모가 사망하거나 만 65세 이상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부모가 모두 건강 등의 사유로 출산‧양육지원이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부모 외 가족에게 방문동거(F-1) 체류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본 판결(수원고등법원 2020. 6. 10. 선고 2019누13400 체류자격불허결정취소) ③난민신청자에게 「난민인정 심사‧처우‧체류 지침」에 따라 출국명령 또는 체류자격변경신청 불허처분을 하면서 비례의 원칙에 따른 심사를 하지 않는 것은 재량권을 행사하지 않았거나 이를 해태함으로써 재량권을 일탈·남용하여 위법하다고 본 판결(서울고등법원 2020. 6. 4. 선고 2019누65780 출국명령처분취소, 수원고등법원 2020. 8. 19. 선고 2020누10162 난민불인정처분취소) 등이 있다.
반면 ①「외국인 유학생 사증발급 및 체류관리지침」에 따라 ‘법무부 유학생정보시스템(FIMS)’에 등록된 교육기관이나 학술연구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학(D-2)으로의 체류자격변경을 거부한 처분을 정당하다고 한 판결(서울행정법원 2020. 6. 11. 선고 2020구단6092 체류자격변경거부처분취소) ②체류기간 도과 후 난민신청을 한 경우 체류기간 연장을 불허한다는 내용의 법무부 비공개 내부지침(「난민인정 심사·처우·체류지침」)에 따라, 난민소송 계속 중인 난민신청자의 체류기간 연장을 불허한 처분이 적법하다고 본 판결(의정부지방법원 2019. 10. 22. 선고 2018구합14436 체류기간연장등부허가처분취소) 등은 이 분야의 걸림돌 판결로 선정됐다.
행정권의 재량에 대한 사법판단 중에는 “2시간 노래클럽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유흥접객업 취업으로 단속되어 기소유예처분을 받은난민신청자(G-1)에게 강제퇴거명령 및 보호명령을 한 것이 행정청의 재량권 남용이라고 본 판결(인천지방법원 2019. 12. 10. 선고 2019구단50684 강제퇴거명령취소)”과 “북한이탈주민이 국적비보유 판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승소한 판결(서울행정법원 2019. 8. 16. 선고 2018구합4182 국적비보유판정취소)”이 디딤돌 판결로, “아무런 재량 판단 없이 오로지 약 13년 전 입국금지결정에만 근거해 재외동포(F-4) 사증발급신청을 거부한 것은 재량권 불행사에 해당하여 위법하다고 한 판결(대법원 2019. 7. 11. 선고 2017두38874 사증발급거부처분취소)”과 “출국명령에 대한 폭넓은 재량권을 인정하면서 성폭력범죄 전력이 한국 사회질서에 위해를 가 하는 행위에 해당될 수 있음을 확인한 판결(서울행정법원 2020. 7. 8. 선고 2020구단58154 출국명령처분취소)”이 주목할 판결로 선정됐다.
■ 이주민들이 특히 어려움 겪는 형사분야, “특수성 감안한 판례들 나와야”
노동 분야에서는 “외국인노동자에 대하여 해당 외국어 통역 등을 통해 충분한 안전교육을 하지 못한 점을 고려하여 외국인노동자의 산재사고에 대해 사업주의 손해배상의무를 인정한 판결(인천지방법원 2019. 9. 24. 선고 2019가단242761 손해배상(산))”이 디딤돌 판결로 선정되어, 외국인 노동자 고용이 증가하고 있는 산업노동현장의 산업안전관리 등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반면 “외국인노동자를 파견 받아 실제 사용한 사업주에게 출입국관리법위반(불법고용)의 면죄부를 준 판결(대법원 2020. 5. 14. 선고 2018도3690 출입국관리법위반)”은 이주노동자 불법 고용 관행을 묵과하는데 일조할 문제적 판결로 지적되면서 걸림돌 판결로 선정됐다.
주목할 판결로는 “취업규칙상 외국인 근로자의 퇴직금 지급배제 규정이 외국인고용법상 차별금지 조항 위반으로 무효라는 점이 설시된 판결(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 2019. 8. 20. 선고 2018가단103370 퇴직금청구)”과 “임금체불 신고한 외국인노동자에 대해 무단이탈 허위신고를 한 사업주에 대한 위자료 책임을 인정하였으나, 이에 따른 재산상 손해와 국가배상 책임은 부정한 판결(의정부지방법원 2020. 2. 7. 선고 2018가단128388 손해배상(국))” 등이 선정됐다.
이주민들이 특히 어려움과 두려움을 겪는 분야가 형사절차다. 형사소송법 등에는 수사나 재판에서 외국인에게 통역을 제공하도록 명시하고 있지만, 통역인의 형사절차 이해도가 낮거나 법률전문용어가 많아 정확한 통역이 제공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실무에서는 구체적인 부분에서의 이주민 당사자의 진술의 차이(번복)를 이유로 그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기도 하고, 외국인이라는 선입견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며, 그 결과 무혐의처분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소유예가 되어버리는 경우들이 빈번하게 지적됐다.
이러한 현실에서도 디딤돌이 되어줄 만한 판결이 나와 선정되었는데, “외국인 여성 이주노동자의 언어적‧경제적‧사회적‧심리적 취약성을 고려하여, 성매매에 이르는 과정에 직접적인 협박이나 적극적인 거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위력에 의하여 성매매를 강요당한 성매매피해자'에 해당할 수 있음을 밝힌 결정(헌법재판소 2020. 9. 24. 선고 2018헌마1224 기소유예처분취소)”과 “외국인 피해자가 수사기관에서 통역 없이 진술한 내용과 법정에서 통역인을 통해 진술한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핵심적인 부분이 일치한다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본 판결(부산지방법원 2020. 2. 6. 선고 2019노2140 상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