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다큐멘터리 ‘목숨’(이창재 감독, 2014)의 한 장면/ 출처 씨네21>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가 지난 2020년 12월 11일, 의료진의 도움(약물 처방)을 받아 목숨을 끊는 ‘조력자살’을 금지하는 법에 대해 위헌결정(사건번호 G139/2019-71)을 했다. 조력자살은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나,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받지 않고 죽음에 이르도록 해주는 안락사보다 더 적극적인 개념이다.
유럽에서는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자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스위스가 1942년 처음으로 조력자살을 허용한 이후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등 4개국에서 안락사나 조력자살을 법적으로 허용했다. 독일 헌법재판소도 2020년 2월 “조력자살을 금지하는 법안은 위헌”이라고 결정했으며, 포르투갈 의회도 같은 달 안락사·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2009년,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자기결정권이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라고 판시하였고(2008헌마385), 2021년 2월 현재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제19조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청구가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에 있다(2019헌마683).
<출처: 헌법재판연구원>
■ 자살에 타인 조력 필요할 때, “수동적 안락사보다 더 존엄하게 죽을 권리” 주장
오스트리아는 연명의료나 인위적인 생명 연장을 배제하는 ‘수동적인 안락사(passive Sterbehilfe)’만을 허용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형법전 제77조에서 촉탁살인죄(“피살자의 진지하고 절박한 요구에 의해 살해한 자는 6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자유형에 처한다”)를, 제78조에서는 자살에 대한 협력을 처벌하는 내용(“타인으로 하여금 자살하도록 유도, 또는 타인의 자살에 조력한 자는 6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자유형에 처한다”)을 규정하고 있다.
청구인들은 위 조문들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청구했다. 제1청구인은 1964년생 오스트리아인으로 온전한 행위능력을 갖고 있으나 다발성 경화증에 시달리고 있고, 치유될 가능성은 없다. 제3청구인은 1940년생 오스트리아인으로 온전한 행위능력을 갖고 있으나, 8년 전부터 파킨슨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제1청구인과 제3청구인은 조력자살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자 하는 확고하고 자유로운 의지에 입각한 결심을 했는데, 이들의 자기결정능력은 질병으로 인해 손상되지 않았으며, 이 결심은 정신질환이나 우울증의 결과가 아니다.
이들은 죽음이 닥칠 때까지 예상되는 질병의 전개와, 이와 관련하여 예상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감내할 의지가 없다. 특히 죽을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의존적으로 의사나 요양보호사, 보호자 등의 제3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진통제나 다른 의약품으로 인해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 또는 이러한 진통제나 의약품의 부작용으로 인해 죽게 되는 상황을 감내할 의지가 없다. 그러한 상황은 청구인들이 주관적으로 감당하기 힘들며,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제1청구인과 제3청구인은 스스로 존엄을 유지하며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상황에 있지 않고, 타인의 조력을 필요로 했다. 조력자살이나 촉탁살인은 오스트리아에서 형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이 같은 형태의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으므로 청구인들은 스위스나 적극적 안락사가 가능한 다른 유럽연합 국가로 가서 이를 이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스위스나 다른 국가로 이동할 수도 없다. 청구인들의 보호자는 각각 청구인들의 요청에 부응하여 이동을 도울 의지가 있지만, 그럴 경우 형법전의 규정에 따라 형사처벌을 받을 위험이 있다. 오스트리아법이 허용하고 있는 단순한 소극적 안락사는 청구인들이 바라는 스스로 원하는 시점에 존엄을 유지하며 생을 마감할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제2청구인은 1945년생 오스트리아인으로 온전한 행위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매우 건강하다. 그는 추후 난치 또는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될 경우, 자신의 생을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마감할지에 관해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고자 한다. 제1청구인이나 제3청구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그러한 병에 걸렸을 때 제3자의 도움에 의존하거나 진통제 또는 다른 의약품에 의해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 놓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제2청구인은 지난 2018년 형법전 제78조상의 ‘자살 조력’으로 기판력 있는 형사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이 규범에 직접적으로 당면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췌장암과 불치의 악성 복막종양으로 매우 고통받던 그의 부인이 자살하는 것을 도왔다는 이유로 10개월의 자유형에 3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제4청구인은 1954년생 오스트리아인으로 일반의학 의사이자 마취 및 집중치료 전문의이다. 그는 문제된 형법전 제77조와 제78조의 규정으로 인해 환자를 존중하며 생명을 마감하는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상담과 지원이 불가하다고 주장한다. 제4청구인은 자주 중대한 결정에 직면하게 되지만, 문제된 규정으로 인해 삶을 마감하고자 하는 환자의 자살에 조력하거나 환자의 요청에 따라 적극적인 안락사를 행하는 경우에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환자의 의지에 반하여 환자를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 역시 형사처벌의 대상이다. 법이 허용하는 ‘수동적 안락사’는 개별 사안에서 ‘환자의 의지를 추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법적으로는 필연적으로 회색지대에 놓이게 된다. 불치병으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환자에게 강한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은 환자의 행위능력의 상실을 초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종국적으로 이와 관련한 부작용으로 인해 환자의 사망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제4청구인의 경우에는 문제된 형법전 제77조와 제78조의 위반으로 인한 형사처벌 외에도 의사협회의 구성원으로서 신분의 안정성에 대한 위협 및 징계 절차에 회부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 오스트리아 헌재, “기본권 형량할 사안 아니라 개인 의지 존중할 사안”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는 “형법전 제78조의 ‘또는 타인의 자살에 조력’이라는 문구는 위헌이므로 폐지한다”고 선고했다. 폐지의 효력은 2021년 12월 31일 이후부터 발생하며, 형법전 제77조(촉탁살인)에 대한 청구는 각하됐다.
재판부는 “직접적인 규범의 수범자가 아닐지라도 조력자살의 금지는 특정한 사람의 행위의 자유를 제한하는바, 문제된 조항은 제1청구인, 제2청구인, 제3청구인이 원하는 자살에서 제3자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그밖에 잠재적 자살을 원하는 자나 제4청구인과 같은 제3자에게도 해당이 되므로 청구인들 모두에게 청구적격이 인정된다”고 했다.
나아가 자살의 ‘유도’와 ‘조력’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면서, “최고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조력’은 자살을 돕는 모든 인과행위로 이해될 수 있고, 자살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조력 없이는 불가능할 필요는 없으며, 자살을 어떤 방식이건 (물리적 또는 정신적으로) 용이하게 하거나 돕는 경우에 조력 요건은 충족된다”는 차이점을 짚었다.
재판부는 유럽인권재판소의 판시를 인용하며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어울리지 않고 비참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제3자의 도움을 통해 자살로 마감하고자 하는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유럽인권협약 제8조에 따른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에 대한 침해에 해당한다”면서 “의학의 발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형태와 정체성으로 계속 살도록 강요받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봤다. 또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인간다운 죽음(의 시점)을 결정할 권리’가 국민의 일반적 권리에 관한 국가기본법 제2조와 연방헌법 제7조 제1항의 평등의 원칙으로부터도 도출된다고 했다.
이어 “연방헌법에서 도출되는 자기결정권은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의 결정과 행위뿐만 아니라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제3자의 도움을 요청할 권리도 포함한다”고 판시하며, “형법전 제78조에서 자살시에 제3자의 조력을 예외 없이 금지하는 규정은 결과적으로 개인이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며 죽을 권리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막게 되어, 개인의 권리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안락사 규정에 대해 연방정부가 광범위한 법정책적 형성여지를 갖는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형법전 제78조는 삶과 죽음의 형성에 관한 절체절명의 결정이자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규정이므로 입법자에게 법정책적으로 넓은 형성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재판부는 “자살하고자 하는 의지가 자기결정권에 기초한 것임이 의심의 여지없이 확인된다면 입법자는 이 의지를 존중해야 하며, 이는 기본권 간 형량할 문제가 아니”라고 못박았다. 다만 “입법자는 남용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당면한 사람이 제3자의 영향 아래에서 자살하고자 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하며, 당면한 사람의 삶의 조건의 차이를 제거하고 모두가 완화의료적 돌봄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입법자 및 국가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