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과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이하 ‘ICC’)가 지난 12월 1일, ‘아시아 태평양 지역 법관 세미나’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ICC 당사국 및 비당사국 법관 간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비당사국 법관들에게는 로마규정 인식을 제고시킬 목적으로 마련됐다. ICC는 2002년 7월 1일 발효한 로마규정에 따라 설립된 세계 최초의 상설재판소로, 현재 가입국은 123개국이며 우리나라는 2003년 가입국이 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환영사를 통해 “대한민국은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장, 권오곤 전 ICC 당사국총회 의장, 정창호 ICC 재판관 등께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시는 등 ICC에 대한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는 대표적인 국가 중 하나”라며 “이번 세미나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하지만, 이 세미나를 발판 삼아 내년에는 서울에서 ICC와 함께 대면으로 법관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번 세미나에는 국제형사법 소연구반 소속 법관 19명이 옵서버로 참여했다”면서 “ICC를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소연구반은 ICC에 관심있는 역내 법관들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면서, 우리 법관들의 ICC에서의 역할 확대 등을 모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피오트르 호프만스키(Piotr Hofmański) ICC 소장 또한 환영사를 통해 “한국은 로마규정의 보편적 관할권을 위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주는 아시아 지역의 중심 국가”라며 “ICC에 관한 논의가 한국 내에서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도록 한국의 법관들이 힘써주기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나아가 “피해자를 위한 정의를 구현하고 중대 범죄를 예방하려는 ICC의 사명은 ICC 당사국 확대라는 과제와 맞닿아 있고, 이는 세계 어느 지역도 법치를 통한 인권 보장의 혜택에서 제외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면서, 특히 “아태 지역 국가 중 로마규정에 가입한 나라의 비율이 3분의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다른 지역의 가입국 비율이 75%에 달한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국제형사법 영역에서 아태지역이 도태될 수도 있다는 설명”이라고 우려했다.
이날 행사는 총 3세션으로 진행됐다. 비당사국 법관을 위해 로마규정을 설명하는 제1세션에서는, 실비아 페르난데스 데 구르멘디(Silvia Fernández de Gurmendi) 당사국총회 의장이 발표를 맡았다. 구르멘디 의장은 “ICC 당사국총회는 ICC의 규칙 제개정과 재판관 등 선출을 담당하면서 123개 가입국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는 한편 “법집행기관이 없는 ICC의 특성상 당사국과 비당사국, 국제기구와 시민사회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123개국뿐 아니라 아태지역 모든 국가가 이에 포함될 수 있도록 이 지역의 법관들께서 ICC에 더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세션에서 모성준 부장판사(전 주 네덜란드 대한민국 대사관 파견법관)는 “아르헨티나 항소법원이 2021. 11.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 부족에 대한 전쟁범죄 혐의에 관하여 아르헨티나 검찰에게 수사할 것을 허가하는 결정을 하였고, 독일 법원 또한 같은 달 전직 ISIS 전투원에 대하여 독일 법원 역사상 최초로 집단학살죄를 적용하여 유죄판결을 선고하는 등 최근 각국 법원이 전쟁범죄 등에 대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ICC와 각국 법원이 어떻게 역할을 분담하여야 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제2세션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ICC 법관이 ICC에서의 경험을 공유하는 순서로, 정창호 재판관(1심 재판부)과 토모코 아카네(Tomoko Akane, 전심부) 재판관이 발표했다. 2015년 3월부터 ICC 재판관으로서 업무를 시작한 정 재판관은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국제전범재판소(ECCC) 재판관을 지낼 때에도 전심 절차에 참여했고, ICC에서도 처음 전심부를 택했는데, 그 덕에 우리나라에는 없는 전심 절차에 대해 깊이 연구할 기회가 되었다”면서 “전심 소속 재판관은 전심 사건뿐 아니라 1심이나 상소심에 진행 중인 다른 사건까지 동시에 담당하기 때문에 ICC에 오는 거의 모든 사건을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업무는 과중해서 매일 심리가 있다”고 전했다. 이어 “현재 소속된 1심부의 사건들은 하나당 심리 3년, 판결문 작성 1년 등 최소 4년이 필요한데, ICC 사건들은 증인의 규모 등을 감안할 때 대개가 이 정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구르멘디 의장이 소장이던 시절 그에게 재판관 업무매뉴얼을 만들 것을 제안해 해마다 제작하게 된 것과 판결례 데이터베이스화를 제안하여 작년 3월 마무리지은 일, 증인 진술을 비디오 링크로 받을 수 있게 제안하여 사무국의 업무와 비용을 대폭 절감하게 된 경험들을 공유하며 “절차적으로 앞선 한국에서의 재판 경험이 이런 제안들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아카네 재판관은 “36년 동안 일본에서 검사 생활을 해서 형사법 절차에 익숙했고 ICC 설립과 ICTY, ECCC 등 특별재판소 설립까지 관심 있게 지켜봤지만 직접 참여할 생각까지 하지는 못했다”고 회고하면서 “검사 이력만으로 재판관으로 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2012년에 ICC 소추관께서 일본 검찰을 방문하여 ICC의 역할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감명깊게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검사로서만 일해 본 사람도 저처럼 얼마든지 ICC에 참여할 수 있으니 비당사국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제3세션은 당사국 및 비당사국 법관들 간 토론 및 네트워킹으로, 권오곤 전 ICC 당사국총회 의장이 진행을 맡았다. 이 세션에는 당사국 법관 9인(△한국: 대전고등법원 모성준 판사 △일본: 히데히토 호소카와 UN 아시아‧극동 범죄예방 및 범죄자 처우 연구소 교수, 마나부 소가 법무성 연수원 국제협력과장, 코타 쿠로키 법무성 연수원 국제협력과장 △방글라데시: 압둘 라흐만 쿠밀라 지역 지방법원 판사, 하비부르 라흐만 방글라데시 대법원 고등재판부 판사 △캄보디아: 소반나라스 신 프놈펜 1심법원 판사 △몽골: 코스바야르 차그다 대법원 판사, 에르데네발수렌 담딘 대법원 판사)과 비당사국 법관 11인(△말레이시아: 다툭 하니파 빈티 파리쿨라 항소법원 판사, 누룰후다 눌아이니 빈티 모하마드 노르 샤 알람 고등법원 사법위원, 레오나드 데이빗 쉼 코타키나발루 고등법원 사법위원 △태국: 자림칫 판타위 대법원장 비서실 판사 △베트남: 레 만 훙 최고인민법원 국제협력과 차장, 응우엔 티 짬 최고인민법원 국제협력과 직원 △라오스: 악소네신 빅사얄라이 형사법원 판사, 술리데스 소인사이 형사법원 판사 △투발루: 코리나 이투아소 라파이 선임 치안판사, 바이푸나 L. 시모나 법무부장관실 선임형사법률자문관, 멜리사 아코 검사) 등 총 20인이 패널로 참여했다.
권오곤 전 의장은 “아시아가 가장 인구가 많고 역동적인 지역이지만 국제조약이나 협약, ICC나 ICJ 등 국제재판소에 가입한 비율이 낮고, 아프리카연합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연합체가 결성되어 있지 않다”면서 “ICC 당사국총회 의장으로 선출됐을 때 세계 각지 중에서도 아태지역에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쉽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의장으로 있는 중에 필리핀이 가입을 철회한 것과 가입이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국 이뤄지지 않은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안타까웠지만, 2019년 바누아투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오랜 시간 대화와 토론을 통해 결국 키리바시의 가입을 이뤄낸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