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해 77세 희수(喜壽)를 치렀다고 했지만, 그가 가진 기개와 열정은 14년 전 고려대 총장으로 취임하던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지난 1월 27일, 2022년도 한국법학원 정기총회에서 제16대 한국법학원장으로 취임한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을 인터뷰하면서 받은 느낌이다.
“저는 매일 아침, 책상 위에 놓인 부모님 사진 앞에서 ‘제게 이렇게 건강한 신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올리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건강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있다며, 그가 한 말이다.
이기수 원장은 한국법학원의 66년 역사상 법학교수로서는 최초로 원장에 선출됐다. 한국법학원은 올해 임원 선출 규정을 한층 까다롭게 개정했는데, 이 절차에서 이 원장은 한국법학원의 구성기관인 대법원, 헌법재판소, 법무부, 대한변호사협회 및 한국법학교수회의 장(長)이 천거한 위원들로 구성된 추천위원회에서 5인의 추천위원들의 의결에 따라 단독후보로 추천된 뒤, 정기총회에서 다시 153명의 대의원들의 동의를 받아 한국법학원 제16대 원장으로 선출됐다.
정영환 한국법학교수회장은 그를 추천하는 추천서에서 “(피추천인은) 법학계와 법 실무계를 아우르는 여러 분야에서 학회장 등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한 경력을 갖고 있고, 뛰어난 학문적 역량으로 우수한 제자들을 다수 배출했으며, 고려대 총장 재임 시절 2천억 원을 모금하여 학교 발전에 기여하는 등, 지나온 그의 삶을 돌이켜 보건대 한국법학원장으로서 어려운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창립 때의 위상을 회복할 최적임자”라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평가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자,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그 비결을 귀띔해 줬다.
“일단 장을 맡으면 그 분야에 열의가 있고 일 잘하는 사람들을 부회장, 상임이사들로 세워놓고, 저는 모금을 해 옵니다. 재정적으로 뒷받침을 충분히 해주면 이 사람들이 신나서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나랑 일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기수랑 일하면 재미가 있다’라고 말을 합디다. 이렇게 해서 제가 동시에 학회장을 두 개도 하고, 세 개도 해 봤죠(웃음).”
그가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인 이상주 변호사(연수원 25기, 現 삼성전자 전무)는 더 구체적으로 그를 설명했는데, “넓은 아량과 배포, 카리스마, 타고난 리더십,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친절하게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스승님의 특징”이라고 하는 한편 “가까이에서 본다면 스승님의 목표에 대한 집념, 실천력, 포용과 인내, 부지런함, 배려심, 즐겁고 유쾌한 소통, 어떤 경우에도 남을 험담하시지 않는 인품까지를 배울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 신혼 때 날아든 징집통지서로 시작된 교수 행보...“교수는 어릴 적부터 꿈”
이기수 원장은 어릴 적부터 꿈이 대학교수라고 했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 끝에 위치한 사촌 형의 집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닌 고2 때는 동네 헌책방의 모든 철학 서적을 탐독할 정도로 철학에 심취하여 철학교수를 꿈꿨다. 하지만 다른 과목 공부에 소홀해진 탓인지 입시에는 실패했고, 재수 후 고려대 법대에 입학하여서는 맨 처음 형법에 매료됐다.
“형법 총론 앞부분에 여러 학자와 이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상당히 재미가 있었어요. 그때 서울대 총장을 지내신 유기천 형법 교수님이 총장직에 계시면서도 매주 월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문리대 대강당에서 형법 강의를 하셨거든요. 그걸 서울대 다니는 제 친구가 알려줘서 저도 매 월요일마다 거기 가서 형법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끄는 건 형법만이 아니었다. 이후 행정법을 공부해 보니 규제를 다루는 행정법도 재미가 있었고, 3학년이 되어서는 기업 문제를 다루는 상법의 매력도 크게 다가왔다. 최종적으로는 회사법을 전공으로 정했지만 여러 영역에 두루 깊이 천착하는 그의 학문적 특성은 지금의 방대한 인맥을 형성하는 데도 톡톡히 역할을 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제가 1984년부터 고려대 법과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제가 강의한 과목이 상법, 국제거래법, 지식재산권법, 경제법 이렇게 네 개입니다. 보통의 교수는 한 과목을 가르치지만 저는 네 과목을 하니까 그만큼 관여하는 학회도 많고, 교류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일들도 다양하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의 교수로서의 첫 행보는 계획에 없던 육사교관 군복무에서 시작됐다. 사연인즉슨, 1970년 혼인하여 겨우 신혼 닷새 째에 접어든 그에게 별안간 징집통지서가 날아왔다. 당시 가장 걱정이 된 건 막 결혼한 아내가 3년 간 독수공방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 여러 방도를 찾던 중, 당시에 입학이 예정되어 있던 서울대 대학원 행정실에서 ‘육사 교수부 특수간부 후보생’ 선발 공고를 알려왔다. 육사특간 제도는 대학원 입학이 예정된 학생이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재학 2학년간 징집이 연기되고, 석사 학위 취득 후 중위로 임관되어 만 3년간 육사생도들에게 자신의 전공분야를 강의하도록 한 제도였다. 이 원장은 이 시험에 합격하여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는 “화랑대와의 인연은 제 50년 교수 인생의 초석이 되어주었고, 그래서 천번 만번 감사할 인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이병준 한국외대 법전원 교수 또한 고려대 법대, 동 대학원을 나와 아버지와 같은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원장은 김형배 교수의 소개를 통해 독일 튀빙엔 대학의 볼프강 쬘르너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재밌는 것은 아들인 이병준 교수 또한 쬘르너 교수의 지도를 받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부자가 한 스승을 모신 거죠. 제가 스승님을 아버지로 여겼으니 제 아들에게는 자동적으로 할아버지가 되신 거고요. 제 아들은 저랑 달리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입니다.”
이 원장은 “친손자와 외손자 총 5명 중 3명이 고려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것도 행복감을 주는 요소 중 하나”라고 덧붙이며, 모교 사랑과 학자로서의 자긍심을 내비쳤다.
■ 오대양 육대주 두루 다닌 국제 네트워킹 능력…“한국법학원에서도 주력할 것”
이 원장이 장 또는 고문을 지낸 학회들(안암법학회, 한국경영법률학회, 한국지적소유권학회, 국제거래법학회, 한국경제법학회, 한국상사법학회, 한독법률학회, 한국도산법학회, 한국독일학회, 한국중재학회, 한중법학회, 한국저작권법학회, 한일법학회, 한미법학회)을 살펴보니, 그의 관심사가 국내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힘주어 말했다.
“한국법학원장으로서 앞으로 제가 가장 주력하려는 일 중 하나는 국내외의 학자 및 법률가들 간 상호교류의 활성화입니다. 특히 국제법률가대회를 주관했던 기구가 없어진 현재 상황에서는 한국법학원이 무엇보다 신경써야 할 영역이라고 봅니다. 한국법학원이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 2026년에는 우리와 법적 교류의 필요성이 큰 독일, 미국, 일본, 중국 등 4개국과 공동으로 국제법률가대회를 개최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까지 위 각 나라들과 공동학술대회 개최 등 교류를 활발히 해나가면서 국제법률가대회 개최의 기반을 잘 다져놓을 계획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책상 위에 놓인 부모님 사진 앞에서 ‘제게 이렇게 건강한 신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올리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건강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있다며, 그가 한 말이다.
이기수 원장은 한국법학원의 66년 역사상 법학교수로서는 최초로 원장에 선출됐다. 한국법학원은 올해 임원 선출 규정을 한층 까다롭게 개정했는데, 이 절차에서 이 원장은 한국법학원의 구성기관인 대법원, 헌법재판소, 법무부, 대한변호사협회 및 한국법학교수회의 장(長)이 천거한 위원들로 구성된 추천위원회에서 5인의 추천위원들의 의결에 따라 단독후보로 추천된 뒤, 정기총회에서 다시 153명의 대의원들의 동의를 받아 한국법학원 제16대 원장으로 선출됐다.
정영환 한국법학교수회장은 그를 추천하는 추천서에서 “(피추천인은) 법학계와 법 실무계를 아우르는 여러 분야에서 학회장 등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한 경력을 갖고 있고, 뛰어난 학문적 역량으로 우수한 제자들을 다수 배출했으며, 고려대 총장 재임 시절 2천억 원을 모금하여 학교 발전에 기여하는 등, 지나온 그의 삶을 돌이켜 보건대 한국법학원장으로서 어려운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창립 때의 위상을 회복할 최적임자”라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평가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자,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그 비결을 귀띔해 줬다.
“일단 장을 맡으면 그 분야에 열의가 있고 일 잘하는 사람들을 부회장, 상임이사들로 세워놓고, 저는 모금을 해 옵니다. 재정적으로 뒷받침을 충분히 해주면 이 사람들이 신나서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나랑 일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기수랑 일하면 재미가 있다’라고 말을 합디다. 이렇게 해서 제가 동시에 학회장을 두 개도 하고, 세 개도 해 봤죠(웃음).”
그가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인 이상주 변호사(연수원 25기, 現 삼성전자 전무)는 더 구체적으로 그를 설명했는데, “넓은 아량과 배포, 카리스마, 타고난 리더십,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친절하게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스승님의 특징”이라고 하는 한편 “가까이에서 본다면 스승님의 목표에 대한 집념, 실천력, 포용과 인내, 부지런함, 배려심, 즐겁고 유쾌한 소통, 어떤 경우에도 남을 험담하시지 않는 인품까지를 배울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 신혼 때 날아든 징집통지서로 시작된 교수 행보...“교수는 어릴 적부터 꿈”
이기수 원장은 어릴 적부터 꿈이 대학교수라고 했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 끝에 위치한 사촌 형의 집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닌 고2 때는 동네 헌책방의 모든 철학 서적을 탐독할 정도로 철학에 심취하여 철학교수를 꿈꿨다. 하지만 다른 과목 공부에 소홀해진 탓인지 입시에는 실패했고, 재수 후 고려대 법대에 입학하여서는 맨 처음 형법에 매료됐다.
“형법 총론 앞부분에 여러 학자와 이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상당히 재미가 있었어요. 그때 서울대 총장을 지내신 유기천 형법 교수님이 총장직에 계시면서도 매주 월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문리대 대강당에서 형법 강의를 하셨거든요. 그걸 서울대 다니는 제 친구가 알려줘서 저도 매 월요일마다 거기 가서 형법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끄는 건 형법만이 아니었다. 이후 행정법을 공부해 보니 규제를 다루는 행정법도 재미가 있었고, 3학년이 되어서는 기업 문제를 다루는 상법의 매력도 크게 다가왔다. 최종적으로는 회사법을 전공으로 정했지만 여러 영역에 두루 깊이 천착하는 그의 학문적 특성은 지금의 방대한 인맥을 형성하는 데도 톡톡히 역할을 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제가 1984년부터 고려대 법과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제가 강의한 과목이 상법, 국제거래법, 지식재산권법, 경제법 이렇게 네 개입니다. 보통의 교수는 한 과목을 가르치지만 저는 네 과목을 하니까 그만큼 관여하는 학회도 많고, 교류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일들도 다양하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의 교수로서의 첫 행보는 계획에 없던 육사교관 군복무에서 시작됐다. 사연인즉슨, 1970년 혼인하여 겨우 신혼 닷새 째에 접어든 그에게 별안간 징집통지서가 날아왔다. 당시 가장 걱정이 된 건 막 결혼한 아내가 3년 간 독수공방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 여러 방도를 찾던 중, 당시에 입학이 예정되어 있던 서울대 대학원 행정실에서 ‘육사 교수부 특수간부 후보생’ 선발 공고를 알려왔다. 육사특간 제도는 대학원 입학이 예정된 학생이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재학 2학년간 징집이 연기되고, 석사 학위 취득 후 중위로 임관되어 만 3년간 육사생도들에게 자신의 전공분야를 강의하도록 한 제도였다. 이 원장은 이 시험에 합격하여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는 “화랑대와의 인연은 제 50년 교수 인생의 초석이 되어주었고, 그래서 천번 만번 감사할 인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이병준 한국외대 법전원 교수 또한 고려대 법대, 동 대학원을 나와 아버지와 같은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원장은 김형배 교수의 소개를 통해 독일 튀빙엔 대학의 볼프강 쬘르너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재밌는 것은 아들인 이병준 교수 또한 쬘르너 교수의 지도를 받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부자가 한 스승을 모신 거죠. 제가 스승님을 아버지로 여겼으니 제 아들에게는 자동적으로 할아버지가 되신 거고요. 제 아들은 저랑 달리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입니다.”
이 원장은 “친손자와 외손자 총 5명 중 3명이 고려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것도 행복감을 주는 요소 중 하나”라고 덧붙이며, 모교 사랑과 학자로서의 자긍심을 내비쳤다.
■ 오대양 육대주 두루 다닌 국제 네트워킹 능력…“한국법학원에서도 주력할 것”
이 원장이 장 또는 고문을 지낸 학회들(안암법학회, 한국경영법률학회, 한국지적소유권학회, 국제거래법학회, 한국경제법학회, 한국상사법학회, 한독법률학회, 한국도산법학회, 한국독일학회, 한국중재학회, 한중법학회, 한국저작권법학회, 한일법학회, 한미법학회)을 살펴보니, 그의 관심사가 국내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힘주어 말했다.
“한국법학원장으로서 앞으로 제가 가장 주력하려는 일 중 하나는 국내외의 학자 및 법률가들 간 상호교류의 활성화입니다. 특히 국제법률가대회를 주관했던 기구가 없어진 현재 상황에서는 한국법학원이 무엇보다 신경써야 할 영역이라고 봅니다. 한국법학원이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 2026년에는 우리와 법적 교류의 필요성이 큰 독일, 미국, 일본, 중국 등 4개국과 공동으로 국제법률가대회를 개최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까지 위 각 나라들과 공동학술대회 개최 등 교류를 활발히 해나가면서 국제법률가대회 개최의 기반을 잘 다져놓을 계획입니다.”

그의 국제적 네트워킹 능력은 고려대 총장 시절 확실히 입증한 바가 있다. 그가 총장으로 재임한 3년 1개월의 기간동안 무려 83개국 748개라는 숫자의 대학들과 MOU를 맺은 것이다. 단순하게 셈해봐도 1개월에 약 20여개 대학과 새롭게 MOU를 체결한 건데, 이는 발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말했다. “그때 제가 아프리카, 남미까지 갔으니까 오대양 육대주를 다 돌고 왔죠. 당시 ‘연세대는 국제화된 대학인데 고려대는 시골 대학이다’라고 폄하하는 말들이 있었어요. 총장으로서 대학 평가도 신경이 쓰였고요. 대학 평가라는 게 세계 각국의 대학에서 평가를 하는 것이라서, 어쨌든 고려대를 세계에 알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죠.”
그 이유가 다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학생을 위한 마음이 이 일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해외 대학과 MOU를 체결해 놓으면 고려대에 등록금을 낸 고려대 학생이 해외 대학에는 돈 한 푼 내지 않고 교환학생으로 갈 수가 있었어요. 여러 나라의 많은 대학과 MOU를 체결해 놓으면, 그만큼 고려대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외국 대학의 폭도 넓어지는 거죠.”
놀라운 일화는 더 있다. 2009년, 러시아 세인트 피터스버그 대학의 크로파체프 총장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던 그는 대학을 방문했다가 현지에서 현대차 공장이 건설허가가 나오지 않아 걱정하는 사정을 알게 됐고, 그 일에는 몇몇의 고려대 교우가 관여되어 있었다. 이 원장은 그 일을 크로파체프 총장에게 이야기했고, 푸틴 대통령과 메드베데프 대통령 모두 피터스버그 대학 출신이다 보니 총장의 전화 한통으로 바로 일이 해결됐다. 이듬해 피터스버그 대학을 다시 방문했더니 이번에는 그 공장에 전기와 수도를 넣어주지 않아 자동차 생산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 원장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또 한번 현대차 공장의 어려움을 드러나지 않게 해결해 주고 왔다.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현대차 측에서 고마워하자 “총장이 해외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을 위해 적극 나서는 게 당연한 직무”라고 답했다는 그다.
■ “재정이 문제라면, 내가 나서야겠구나”...한국법학원장으로
이기수 원장과 한국법학원의 인연은 1991년부터 시작됐는데, 당시 그는 한국법학교수회 사무총장으로서 한국법학원의 당연직 연구이사를 맡았다. 그가 2006년 한국법학교수회장을 지낸 때에는 한국법학원 창설 50주년 기념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국법학원장직을 수행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2019년에 접한 법률신문의 한 기사 때문이라고 했다.
“기사를 보니, ‘한국법학원 재정이 날로 어려워진다’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나는 속으로 ‘재정이 문제라면 내가 나서야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죠.”
재정 확보에 대한 이 같은 그의 자신감은 근거가 충분했는데, ‘이기수가 이끄는 단체는 살림이 좋아진다’는 말은 이미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확고하게 자리잡은 평판이다. 당시 대한중재인협회장이던 그는 독립된 사무실도 없던 협회 살림을 여러 기업의 후원금을 통해 한층 윤택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고려대 총장 시절에는 2천억 원의 모금을 통해 전방위적 학교 발전을 이뤄내기도 했다.
다만 총장 시절 모금액 2천억 원에 대하여는 “시절이 좋았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때만 해도 기업이 대학에 기부하고 대학이 기업 후원을 받고 하는 일들이 참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기업이 대학에 건물을 지어주는 일들도 활발했고요. 요즘은 그렇게 못하죠. 그래서 ‘이기수는 참 좋을 때 총장했다’라는 말도 들어요.”
자기 주머니에서 선뜻 돈을 꺼내놓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돈을 받아쓸 생각도 쉬이 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의 출중한 모금 능력을 보면, 그 또한 남을 위해 내놓은 금액이 상당할 거라는 추론이 가능했다.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내놓은 총 2억여 원을 비롯하여 동아일보에서 학생들 장학금 마련을 위해 조성한 ‘동아꿈나무 재단’에 총 1억 5천만 원, 국제라이온스협회에 총 3억여 원 등, 역시나 그에겐 기부가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를 질문하니, “내가 살아온 게 다 주변의 도움 덕분”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9살 때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는 많은 땅을 물려주셨기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없는 채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데는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그때마다 그는 선생님이나 주변에서 내밀어 주는 도움의 손길을 붙잡고 지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겐,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면, 남을 돕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법학원에도 저부터 기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뿐 아니라 한국의 법문화와 법치주의 발전, 법학과 법실무의 선진화라는 중요하고도 숭고한 한국법학원의 사명에 뜻을 같이하고 힘을 보태려는 기업이나 외부 기관들이 더 있을 거라고 봅니다. 또 한국법학원의 구성기관인 대법원과 법무부 등에서도 기존의 소극적 후원에 머무르지 않고, 각종 행사의 공동주최 등의 형태로 보다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때 제가 아프리카, 남미까지 갔으니까 오대양 육대주를 다 돌고 왔죠. 당시 ‘연세대는 국제화된 대학인데 고려대는 시골 대학이다’라고 폄하하는 말들이 있었어요. 총장으로서 대학 평가도 신경이 쓰였고요. 대학 평가라는 게 세계 각국의 대학에서 평가를 하는 것이라서, 어쨌든 고려대를 세계에 알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죠.”
그 이유가 다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학생을 위한 마음이 이 일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해외 대학과 MOU를 체결해 놓으면 고려대에 등록금을 낸 고려대 학생이 해외 대학에는 돈 한 푼 내지 않고 교환학생으로 갈 수가 있었어요. 여러 나라의 많은 대학과 MOU를 체결해 놓으면, 그만큼 고려대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외국 대학의 폭도 넓어지는 거죠.”
놀라운 일화는 더 있다. 2009년, 러시아 세인트 피터스버그 대학의 크로파체프 총장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던 그는 대학을 방문했다가 현지에서 현대차 공장이 건설허가가 나오지 않아 걱정하는 사정을 알게 됐고, 그 일에는 몇몇의 고려대 교우가 관여되어 있었다. 이 원장은 그 일을 크로파체프 총장에게 이야기했고, 푸틴 대통령과 메드베데프 대통령 모두 피터스버그 대학 출신이다 보니 총장의 전화 한통으로 바로 일이 해결됐다. 이듬해 피터스버그 대학을 다시 방문했더니 이번에는 그 공장에 전기와 수도를 넣어주지 않아 자동차 생산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 원장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또 한번 현대차 공장의 어려움을 드러나지 않게 해결해 주고 왔다.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현대차 측에서 고마워하자 “총장이 해외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을 위해 적극 나서는 게 당연한 직무”라고 답했다는 그다.
■ “재정이 문제라면, 내가 나서야겠구나”...한국법학원장으로
이기수 원장과 한국법학원의 인연은 1991년부터 시작됐는데, 당시 그는 한국법학교수회 사무총장으로서 한국법학원의 당연직 연구이사를 맡았다. 그가 2006년 한국법학교수회장을 지낸 때에는 한국법학원 창설 50주년 기념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국법학원장직을 수행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2019년에 접한 법률신문의 한 기사 때문이라고 했다.
“기사를 보니, ‘한국법학원 재정이 날로 어려워진다’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나는 속으로 ‘재정이 문제라면 내가 나서야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죠.”
재정 확보에 대한 이 같은 그의 자신감은 근거가 충분했는데, ‘이기수가 이끄는 단체는 살림이 좋아진다’는 말은 이미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확고하게 자리잡은 평판이다. 당시 대한중재인협회장이던 그는 독립된 사무실도 없던 협회 살림을 여러 기업의 후원금을 통해 한층 윤택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고려대 총장 시절에는 2천억 원의 모금을 통해 전방위적 학교 발전을 이뤄내기도 했다.
다만 총장 시절 모금액 2천억 원에 대하여는 “시절이 좋았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때만 해도 기업이 대학에 기부하고 대학이 기업 후원을 받고 하는 일들이 참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기업이 대학에 건물을 지어주는 일들도 활발했고요. 요즘은 그렇게 못하죠. 그래서 ‘이기수는 참 좋을 때 총장했다’라는 말도 들어요.”
자기 주머니에서 선뜻 돈을 꺼내놓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돈을 받아쓸 생각도 쉬이 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의 출중한 모금 능력을 보면, 그 또한 남을 위해 내놓은 금액이 상당할 거라는 추론이 가능했다.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내놓은 총 2억여 원을 비롯하여 동아일보에서 학생들 장학금 마련을 위해 조성한 ‘동아꿈나무 재단’에 총 1억 5천만 원, 국제라이온스협회에 총 3억여 원 등, 역시나 그에겐 기부가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를 질문하니, “내가 살아온 게 다 주변의 도움 덕분”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9살 때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는 많은 땅을 물려주셨기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없는 채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데는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그때마다 그는 선생님이나 주변에서 내밀어 주는 도움의 손길을 붙잡고 지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겐,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면, 남을 돕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법학원에도 저부터 기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뿐 아니라 한국의 법문화와 법치주의 발전, 법학과 법실무의 선진화라는 중요하고도 숭고한 한국법학원의 사명에 뜻을 같이하고 힘을 보태려는 기업이나 외부 기관들이 더 있을 거라고 봅니다. 또 한국법학원의 구성기관인 대법원과 법무부 등에서도 기존의 소극적 후원에 머무르지 않고, 각종 행사의 공동주최 등의 형태로 보다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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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법학원은 국내의 모든 법률가, 즉 판사, 검사, 변호사, 대학교수 등 법 관련 모든 직역을 포섭하는 유일한 빅텐트다. 이 원장은 “특히 이 점이 한국법학원의 존재의 이유이자 경시할 수 없는 중요한 사명”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66년 전 창립 때에 비하면 한국법학원을 이루는 각 직역단체들이 이제는 많이 비대해졌습니다. 이는 곧 한국법학원의 역할 축소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한계를 크게 보지 않습니다. 한국법학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모든 법률가를 아우를 수 있는 한국법학원이라는 조직의 필요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국민이 사법개혁을 요구하지만 지금처럼 법원 따로, 검찰 따로, 변협 따로, 학계(로스쿨) 따로, 이렇게 가서는 국민의 눈높이를 충족할 수 없고, 직역이기주의에만 매몰될 우려가 있어요. 모든 법 영역과 직역이 균형 있고 조화롭게 개혁을 이뤄나갈 수 있도록, 그 논의와 교류의 장을 제공하는 역할은 우리 한국법학원만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한국법학원장으로서 제가 그 일을 충실히 해내겠습니다.”

< 대담, 정리: 김주미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