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이종엽)가 지난 2월 22일, “한국형 디스커버리 도입방향”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제는 김원근 변호사(사시 30회/미국 버지니아·메릴랜드·디시 변호사)가 맡았다. 그는 발제를 통해 “우리나라 증거조사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과 달리 미국 법원에서는 엄청나게 활성되어 있다”고 전하며, 양국의 차이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짚어보고 개선안을 제시했다.
김 변호사는 “국제중재재판은 물론이고 국제무대에서 규모 있는 중요한 케이스는 대부분 미국 법정에서 해결되고 있으므로, 미국식 증거조사 방식을 이해하고 경험한 법률가들은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법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이를 위해) 한국의 로스쿨에서도 미국식 증거조사를 교육해야 하고, 나아가 우리 재판실무에 하루빨리 도입하여 운영해야 우리나라 법조인들의 국제무대 진출 및 활약을 도울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나아가 “미국의 형사재판 관련 증거조사(Discovery)의 기본 원칙은 연방헌법 제5조에 정한 ‘적법절차 및 국민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근거하는데, 우리나라도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이런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식 제도를 도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도입을 늦출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 증거조사에 대한 법원의 역할…‘주도’하기보다 ‘감독’해야
김원근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당사자 신문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판사가) 소장이나 준비서면에 나온 주장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반대신문만 하면 된다는 잘못된 선입견이 있어서인데, 이는 지금은 개정되었지만 ‘당사자 증인신문은 보충적으로만 허용된다’는 구 민사소송법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형사사건의 경우 주 헌법에 ‘피고인은 본인에게 필요한 증인을 무제한으로 신청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점을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고, 민사사건에서는 주 법률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 혹은 당사자 본인도 언제든 증인으로 선서하고 증언할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하고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당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판사로서는 이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증거조사 관련 법률과 실무를 보면 모두 법원이 주관하고 있는데 반하여 미국의 증거조사는 변호사 등 당사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결정적 차이”라고 말하면서, “법원이 감독 역할에 그치는 것은 효율을 크게 높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먼저, 법정외 증인신문을 법원의 주재하에 하게 되면 장소와 시간문제가 심각하다고 꼬집었다. 미국처럼 당사자들이 지정하는 장소에서 시간 제한 없이 철저하게 당사자와 증인을 신문하여 진실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증거조사의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절차도 아주 간편한데, 법원의 허가를 받을 필요 없이 당사자의 판단으로 언제든지 증거조사를 신청할 수 있고, 이의가 있는 상대방은 법원에 이의신청을 하면 된다. 김 변호사는 “실무적으로는 이의신청 관련해서 법원이 변론을 여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변호사들 간에 이의를 해결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당사자 신문은 원칙적으로 하루 7시간을 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더 연장할 수 있다. 신청인 쪽의 질문 내용에 대해서도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는데, 케이스의 진실발견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내용이든 물어볼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무적으로는 당사자 혹은 증인신문과 문서제출명령 혹은 문서송부촉탁신청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 다만 변호사와 의뢰인 간 비밀유지권이나 언론사 기자들의 취재원 비밀보호권 등에 기해 보호명령신청이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 보통은 양측 변호사들이 먼저 합의를 하여 그 범위를 정해 법원판사의 승인을 받는 식으로 진행되나, 합의가 되지 않으면 변론을 열어 결정한다.
당사자 또는 증인이 법정외 신문에 출석하지 않은 경우, 신청한 쪽에서는 법정외 신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들어간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 여기서 비용은 ‘변호사가 신문을 준비하기 위해 소비한 시간과 노력’, 즉 변호사 비용이다. 김 변호사는 “이처럼 변호사 비용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위반행위에 대한 강력한 제재수단”이라고 말하며, “당사자가 계속해서 법정외 증인신문에 응하지 않을 경우 △당사자의 주장을 최종재판에서 받아들이지 않거나 재판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승소판결을 하는 등 최악의 결과가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제3의 기관에 문서를 보내달라는 신청을 했는데 해당 기관이 불응하는 경우, 미국에서는 법원에 변론을 열어달라고 신청해서 문서를 보내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 소명하라고 신청할 수 있다. 김 변호사는 “이때 소환장을 받은 기관에서는 변론기일 이전에 문서를 내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만약 변론에 출석해서 주장하는 내용을 판사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신청인 쪽의 변호사 비용을 보상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라면서 “사실조회 촉탁 관련하여 회신이 너무 많이 지연되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우리나라도 위와 같은 방법을 이용하면 답신을 앞당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제안했다.
■ “판사 예단 배제되고 법원 업무부담 경감되어 법률문화 발전에 큰 도움”
김 변호사는 “미국식 증거조사 과정에서 ‘판사의 예단이 철저하게 배제된다’는 점은 주요한 장점”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동일한 재판부에서 케이스를 주관하므로 재판부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변론의 방향이 크게 좌우되는데, 이 때문에 의뢰인들이 재판부와의 연줄을 찾아 변호사 선임을 하는 경향이 뚜렷해지는 부정적인 현상이 생겨났다는 진단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변론이 열릴 때마다 판사가 다르다. 변론기일 2~3일 전에 담당판사가 정해지므로, 증거조사 과정에서 판단했던 판사와는 다른 판사가 최종재판을 담당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재판부와 친분이 있는지 여부가 변호사 선임 시 고려되는 요소가 아니라는 게 그의 말이다.
당사자가 신청하는 증거를 원칙적으로 모두 받아준다는 점도 우리 법원과의 차이점이라고 했다. 김 변호사는 “우리나라처럼 판사가 증거채택여부 결정을 하는 방식은 당사자의 증거제출권을 제약할 뿐 아니라 판사의 예단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우려가 있어 단점”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또한 미국에서는 법정외 증인신문에서 모든 사실관계가 나오기 때문에, 사실관계 중심의 준비서면은 필요가 없고, 법원 역시 사실관계 판단 위주의 판결문은 작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당사자신문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면 변론을 열어도 자연히 법적인 이슈 중심으로 공방이 벌어지고, 판결문 내용에도 사실관계는 거의 들어가지 않고 법률이슈가 중심이 되어 이것들이 케이스로(Case Law)로 발전한다”고 전하면서 “이런 방식이 판사의 업무부담을 상당히 경감해 주고, 이는 법률문화 발전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미국식 증거조사를 채택하게 되면 사실심의 충실화로 인해 사실관계에 관한 다툼은 일심으로 충분하게 종결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법정외 증인신문은 최종재판 이전에 중간재판으로 케이스를 종결할수 있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도 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당사자들이 최종재판에 가는 비율이 10퍼센트 미만인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게 바로 법정외 당사자 및 증인신문이다. 법정외 신문에서 하루종일 상대방 변호사의 호된 신문에 시달린 당사자들은 케이스를 계속 진행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진 나머지 최종재판까지 가기를 단념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속기록에 기록된 내용을 준비서면에 반영하여 중간재판을 신청하게 되면 그때까지 나타난 사실관계를 근거로 하여 판사재판에 의한 중간재판으로 케이스를 판단하는 게 가능하다. 다만 가사사건은 사실관계 다툼이 주된 이슈이기 때문에 중간재판으로 종결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한편 김 변호사는 “미국 법원에서는 변호사와 검사가 재판 과정에서 판사의 직원 신분으로 여겨질 정도로 판사의 권위와 권한이 막강하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변호사와 검사는 증거조사과정에 성실히 임해야 하고, 불필요하게 재판을 지연하는 경우 판사가 이들을 징계할 수 있다. 당사자가 허위주장의 법률문서를 제출하거나 증거조사과정에서 증거를 일부러 숨기는 경우, 당사자가 법원에 제출한 합의서에서 정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 등도 마찬가지로 판사에게 징계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징계권을 통해 미국의 판사는 법정과 재판제도의 권위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징계의 주도권도 법원이 아닌 당사자가 쥐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 “미국식 증거조사는 비용 부담 가중시킨다”는 우려, ‘일축’
미국식 증거조사가 당사자에게 큰 비용 부담을 지운다는 이유로 도입을 반대하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증거조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변호사 비용과 전문가 증인비용 그리고 속기비용인데,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 소장 인지대가 얼마나 비싼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반박하면서 “(우리는) 10억의 경우 인지대로 500만원을 내야 하는데 미국에서는 50만원 정도”라고 지적했다.
이어 “결과를 놓고 보면 위반하는 쪽의 비용부담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소송비용과 변호사 비용을 위반자에게 부담하도록 법에서 명문으로 정한 경우가 많아서, 사회적 약자들은 소송비용과 변호사 비용 부담없이 증거조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백만 원 정도 소액의 임금청구 사안에서 최종 재판 결과 근로자에게 십만 원이라도 인정되면, 증거조사 과정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고용주가 부담하게 되므로 법을 위반한 고용주는 비용이 들어가지만, 근로자는 손해보는 게 전혀 없이 증거조사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대법원규칙에서 정한 바에 의해 소송가액과 승소비율에 따라 패소자가 부담할 변호사비용을 산정한다. 이 경우의 문제점은 소송가액이 소규모인 경우, 특히 인권이나 위와 같은 노동 관련 사건에서 제대로 된 변호사 보수를 보상받기 어렵다는 점이라는 게 김 변호사의 말이다. 일부승소의 경우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그는 “(미국은) 계약에서 변호사 보수를 위반자 부담으로 정한 경우 우리나라처럼 승소비율을 계산하여 변호사 비용을 인정하지 않고 일부승소여도 변호사 비용을 전액 인정해주기 때문에, 간단한 의제자백 사건이어도 규모가 큰 사건은 최종재판까지 간다면 상대방이 부담할 변호사 비용(시간당 청구)이 엄청난 부담이 된다”면서, “‘미국인들이 계약을 잘 지킨다’라는 통념은 이처럼 계약을 위반하는 쪽이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게 한 데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한편 김 변호사는 “미국식 증거조사에서 입증책임의 중요성은 우리나라에 비하면 거의 의미가 없다”고 전하면서, “물론 최종판단에는 입증책임을 항상 고려하지만 증거조사 단계에서는 입증책임과 무관하게 가지고 있는 증거자료를 모두 제출하여야 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증거공통의 원칙’이 명실상부하게 작용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기업이나 정부기관 등 법인의 경우에도 예외가 없다. 만약 증거를 숨기는 게 발견될 경우 상대방의 변호사 비용뿐만 아니라 숨어있는 증거를 발견하는데 들어가는 전문가 비용을 모두 부담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재판에서 패소할 수도 있기 때문에 증거자료 제공에 적극 협조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법인을 상대로 한 법정외 신문은 당사자 본인을 신문하는 것과 비교할 때 오히려 더 강력한 효과가 있게 된다. 김 변호사는 “법인에 대해서는 질문할 내용을 사전에 알려주고 준비하도록 하기 때문에 법인을 상대로 한 케이스의 경우 법정외 증인신문을 근거로 하여 중간재판으로 케이스를 종결할 가능성이 일반 케이스에 비하여 더 많다”고 설명했다.